송현근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때,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와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시장 일대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목사·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 사망 연도1935년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868년(고종 5)
  • 출생지평양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윤경로 (한성대학,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평안남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와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시장 일대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목사·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평양 출신. 1911년 평양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뒤 강서군 사천시장교회(沙川市場敎會)에서 시무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인근 대동군(大同郡)의 반석(盤石)·원장(院場)교회에서 합동으로 시위운동을 펼 것을 계획하는 가운데, 송현근은 이미 독자적으로 사천교회에서 시위운동을 준비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김해진(金海鎭) 등 10여명의 동지가 일본헌병에게 검거되었다.

이때 송현근은 원장리로 피신하여, 원장·반석교회 중심으로 3월 4일 원장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하자 군중에게 사천에서 검거된 동지들을 구출할 것을 호소하였다. 송현근 등 130명은 사천으로 진출, 대규모시위를 주도하고 40명의 청년결사대를 선두로 수천명의 군중이 모락장 헌병분견소로 진출하여 일본수비대의 발포·사격에 투석으로 저항하였다.

일시 우세하였던 시위대는 예비구금된 동지 전원을 구출하고 일본헌병 4명을 살해하였다. 이때 시위대원 중 15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평양헌병대는 즉각 일본군 약 500명을 출동시켜 원장·반석·사천 등지에서 기독교인 등 400여 명을 검거하여 49명을 구속하였다.

그러나 주모자인 송현근은 평양으로 피신하여 검거를 모면하였으며, 곧 만주로 망명하였다. 일제당국은 궐석재판을 통하여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만주로 간 송현근은 서간도 삼원보지역에서 기독교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 『조선3·1독립운동』(박경식, 평범사, 1976)

  • - 『3·1운동사』(윤병석, 정음사, 1975)

  • - 『朝鮮獨立運動』 1 (金正明 編, 原書房, 1967)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