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출신. 1911년 평양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뒤 강서군 사천시장교회(沙川市場敎會)에서 시무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인근 대동군(大同郡)의 반석(盤石)·원장(院場)교회에서 합동으로 시위운동을 펼 것을 계획하는 가운데, 송현근은 이미 독자적으로 사천교회에서 시위운동을 준비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김해진(金海鎭) 등 10여명의 동지가 일본헌병에게 검거되었다.
이때 송현근은 원장리로 피신하여, 원장·반석교회 중심으로 3월 4일 원장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하자 군중에게 사천에서 검거된 동지들을 구출할 것을 호소하였다. 송현근 등 130명은 사천으로 진출, 대규모시위를 주도하고 40명의 청년결사대를 선두로 수천명의 군중이 모락장 헌병분견소로 진출하여 일본수비대의 발포·사격에 투석으로 저항하였다.
일시 우세하였던 시위대는 예비구금된 동지 전원을 구출하고 일본헌병 4명을 살해하였다. 이때 시위대원 중 15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평양헌병대는 즉각 일본군 약 500명을 출동시켜 원장·반석·사천 등지에서 기독교인 등 400여 명을 검거하여 49명을 구속하였다.
그러나 주모자인 송현근은 평양으로 피신하여 검거를 모면하였으며, 곧 만주로 망명하였다. 일제당국은 궐석재판을 통하여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만주로 간 송현근은 서간도 삼원보지역에서 기독교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