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영(致永), 호는 석운(石雲).
갑신정변 이후 김용원(金鏞元) 등 4명과 함께 러시아 황제에게 협조를 요청할 목적으로,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밀파되었다.
러시아 관원과의 접촉을 위해 전영영관(前營領官)의 신분을 이용, 총포 구입차 러시아에 가는 길이라고 하며 경흥(慶興) 관문을 통과, 러시아와 비밀접촉을 가졌다고 한다.
1892년에는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 망명 중인 김옥균(金玉均) · 박영효(朴泳孝) 등을 암살할 목적으로, 이일직(李逸稙)과 아우 권재수(權在壽) 등과 함께 일본에 밀파되었다. 권동수는 친군장위영영관(親軍將衛營領官)으로, 이일직은 미곡무역상인으로 가장하고, 권재수는 통역관 자격으로 갔다. 이들은 1893년 가을에 프랑스에서 귀국길에 동경에 들른 홍종우(洪鍾宇)를 포섭하여 김옥균암살계획을 구체화하였다.
1894년 3월 김옥균 · 홍종우가 상해로 떠나자, 이일직이 세운 계획에 따라 박영효 암살을 기도하였다. 즉, 권동수가 서예에 능한 점을 이용해 박영효의 별실에서 휘호를 쓴 뒤, 박영효가 품평을 하는 사이 저격할 계획을 세웠다.
박영효가 투숙하고 있는 친린의숙(親隣義塾)에 김태원(金泰元)을 보내 박영효를 유인하게 하였는데, 그가 도착하자 바로 계획이 누설되어 계획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권동수 형제는 권총과 일본도를 휴대하고 운래관(雲來館)에 대기하고, 이일직이 직접 박영효를 방문, 암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일직은 박영효의 친구인 이규완(李奎完) · 정난교(鄭蘭敎) 등에 의해 붙들려, 친린의숙에 감금되고 말았다.
박영효 암살에 실패한 뒤 일본주재 조선공사관에 피신, 보호를 받다가 귀국하였다. 1898년 12월 보부상을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탄압할 때 뒤에서 조정하였고, 1900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 통상사무관으로 임명되었다. 서예에 매우 능했는데, 그 중에서도 행서와 전서에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