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1월 23일 정광렴(鄭光濂)의 셋째 아들로 충청도 목천에서 출생했다. 조선 말기에 육군 부령, 군부대신 관방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대한제국기에는 중추원 부찬의, 일제강점기에는 충청남도 참여관, 중추원 참의 등을 지냈다. 1943년 12월 28일 사망했다.
지역 유지인 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서울에 올라왔다. 관직에 있는 형 정윤교(鄭倫敎)의 집에 머물면서 명문가 자제들과 교류하는 한편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1882년 3월 김옥균(金玉均)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1883년 일본 육군 도야마[戶山]학교에 입학했다. 같은 해 5월 서재필(徐載弼), 서재창(徐載昌), 박응학(朴應學) 등 일본으로 온 유학생과 합류했다. 1884년 8월 육군 도야마학교를 졸업했다.
귀국 후 한량(閑良)으로 지내다가 남행부장(南行部將), 좌영군사마(左營軍司馬), 전영군사마(前營軍司馬)를 역임하였다. 갑신정변 때 행동대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서재필의 지휘를 받아 경우궁(景祐宮) 내부 경호에 힘썼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박영효(朴泳孝) 등과 함께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와 함께 일본으로 갔다. 일본 망명 중 유혁로(柳赫魯), 이규완, 신응희 등과 같이 김옥균·박영효의 신변보호를 담당하였는데, 1886년 조선 정부에서 파견한 자객 지운영(池運永)의 정체를 폭로하여 암살 위험을 모면하게 하였다. 또한, 1894년 3월 김옥균을 상해로 유인하여 보내고, 박영효를 암살하려던 자객 이일직(李逸稙)을 체포하여 일본 경찰에 넘겼다.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이규완, 유혁로와 함께 박영효를 따라 1894년 8월 귀국했다. 귀국 후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서 일본군 접응관(接應官)으로 출전해 일본군과 함께 농민군을 탄압했다. 특히 전의, 논산 등지에서 수많은 농민군을 살육하고, 공주 우금치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을 물리치고 전주성을 다시 빼앗았다. 그해 12월 사면되었고 동학농민전쟁을 진압한 공으로 1895년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에 오르고 2월 군무아문 참의(軍務衙門參議), 4월 육군 부령(陸軍副領)·군부대신 관방장(軍部大臣官房長)에 임명되었다. 1895년 7월 박영효가 다시 일본으로 망명한 후에도 국내에 은신해 있었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에 유혁로, 신응희, 이주회(李周會), 이두황(李斗璜)과 함께 조선인 행동대로 가담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다시 망명했다. 망명 중에는 나카하라 유조[中原雄三]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907년 9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특사로 사면되었고, 11월 정3품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
국권피탈 후인 1910년 10월 충청남도 참여관이 되었고 은사금 1,000원을 받았다. 1912년 8월 조선총독부에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912년부터 1914년까지 임시문관보통시험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14년 12월 조선총독부의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충남사무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충청남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을 겸임하면서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에 협력했다. 1915년 4월 판임문관견습시험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1월 다이쇼[大正]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1년 2월부터 1923년 2월까지 문관분한령(文官分限令)에 따라 2년간 휴직했다.
1927년 6월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 주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43년 12월 타계할 때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1,200원의 수당을 받았으며, 1941년 4월에는 칙임관 대우 참의가 되면서 1,8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28년 11월 쇼와[昭和]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1930년 5월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9년 11월 조선유도(儒道)연합회 평의원을 지냈으며, 1940년 창씨 개명한 이름은 우미히라 난로리[海平蘭敎]이다.
정난교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37∼50)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