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갑신정변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민씨척족정권은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의 정변 주모자들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체포 및 송환을 여러 차례 일본정부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만국공법상 망명정치범을 송환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민씨정권의 송환 요구를 매번 거절하였다. 이에 민씨정권은 1886년 지운영(池運永)을 일본에 보내어 김옥균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1890년 김옥균이 북해도(北海島)로부터 내지귀환(內地歸還)의 허락을 받아 동경으로 돌아오자, 민씨정권은 다시 김옥균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892년 5월 김옥균 암살을 위해 민씨정권의 영수 민영소(閔泳韶)는 이일직을 두목으로 해 권동수(權東壽)·권재수(權在壽) 형제를 파견하였다.
일본으로 건너온 이일직은 풍부한 자금을 쓰면서 일본정객을 통해 김옥균·박영효 등에게 접근하였다. 그리고 권동수·권재수 형제 외에 프랑스유학생으로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던 홍종우(洪鍾宇)를 포섭해, 홍종우에게 김옥균을 유인해 암살하도록 사주하였다.
1894년 3월 경 이일직은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지내던 김옥균에게 일본에서의 부채를 상환해 주고 상해로 가는 배삯까지 부담하였다. 또한, 중국에서의 활동자금으로서 5,000원짜리 수표까지 제공하였다.
그 수표는 상해 동북문 밖에 있는 천풍보호(天豐寶號)가 지불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은 위조수표로서 김옥균을 유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일직은 이 수표를 환금하기 위해 자기 대리인으로 홍종우를 동반하도록 요청하였다. 이일직의 계략에 빠진 김옥균은 1894년 3월 23일 사이쿄마루[西京丸]로 일본 고베항(神戶港)을 출발해 27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28일 이일직의 사주를 받은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였다.
김옥균의 암살에 성공한 뒤, 다시 권동수·권재수 형제와 일본인 가와쿠보[川久保常吉]를 매수해 박영효 암살계획을 실행하려 하다가 발각되었다. 박영효의 동지 이규완(李圭完)·정난교(鄭蘭敎) 등에게 잡혀 일본경찰에 인계되었다가 본국으로 압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