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해 평안북도 정주납청정(納淸亭)과 선천에서 조직된 협성동사(協成同事)와 상무동사총지점(商務同事總支店) 등과 함께 조직된 신민회(新民會)의 재정후원 단체의 하나로 서북지방 상인들이 1908년 2월 용천 장시(場市)에 설립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서북지방에서의 일본의 경제적 침투가 강고해졌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서북지방의 자본가와 상인들이 토착 자본을 규합하여 설립한 단체로 오늘날의 주식회사에 해당된다. 선천의 상무동사 총지점의 경우 창립 때 출자자가 100명에 이르고, 자본금 총액이 9,000원에 달하였던 점으로 보아 상당한 규모의 회사였음을 알 수 있다.
창립 때 참가한 사람은 이승훈(李昇薰)·오희원(吳熙源)·양준명(梁濬明)·황국보(黃菊保, 일명 菊補)·송자현(宋子賢)·최준정(崔俊定)·이창화(李昌화) 등으로 서북지방의 대표적인 자본가 내지 유수한 토착 상인들로 구성되었다.
청국과 일본을 통해 수입된 화장품·거울·안경·석유·다리미·담배·램프 등 근대 서구의 생활품과 잡화를 취급하고, 또 곡물 등 국내 생산품을 중개 매매하던 잡화상의 성격으로 출발하였다.
창립 1주년이 되는 1909년 2월, 한 해의 영업이윤을 결산하여 출자자 모두에게 출자금 매 10원당 1원 83전 3리의 이윤을 배당한 바 있다. 선천의 상무동사 총지점은 1909년 2월 주주총회를 개최하여 한 해의 사업활동을 결산하고, 임원진을 송자현·양준명 등으로 교체하기도 하였다.
1910년 5월 당시 인천에 지점을 설치한 이탈리아 국적의 무역상사 파마양행(巴馬洋行)과 1만 5000원에 달하는 서구 상품의 수입계약을 체결하고 계약금조로 4,500원을 지불하는 등 대규모 수입상사로서의 면모를 갖출 만큼 규모가 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제의 압력을 받은 파마양행측의 대표가 칭병(稱病)하고 갑자기 귀국함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일제 당국은 당시 상무동사의 활동을 일본상품 배척운동의 일환으로 인식하여 방해했던 것이다.
상무동사는 상업활동 이외도 서북지방에서 1910년을 전후하여 전개된 이른바 백일세항세운동(百一稅抗稅運動) 등 일종의 경제적 항일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1909년 4월 통감부령으로 시장에서 판매액의 100분의 1을 시장세(市場稅)라는 명목으로 징수할 것을 공포하였다. 이에 그 해 12월 18일 용천 양시에서 상무동사의 임원인 송자현·황국보 등이 중심이 되어 시장세 납세거부운동을 추진하였다.
또한, 1910년 1월 평안남도 순천시장에서도 상무동사의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일인들의 상점을 파괴하고 방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을 타살하는 일종의 상민봉기항세운동(商民蜂起抗稅運動)과 같은 격렬한 항일경제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로 상무동사의 임원진은 일제의 강점 직후 일제에 의해 날조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전원 구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