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여순사건 당시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좌익 청년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은 기독교 목회자. 순교자.
인적사항
주요 활동
1926년 경남성경학원에 입학하였고 부산 감만동에 있던 부산 나병원 내의 상애원교회(감만리교회) 외지 전도사를 겸했다. 경남성경학원에서 초량교회의 목사 주기철(朱基徹)과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 경남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울산 방어진교회 · 남창교회 및 양산의 원동교회 등에서 순회전도사로 활동하였다. 김교신을 비롯한 한국의 무교회주의자들이 간행하던 잡지 『성서조선』을 구독하였으며 이 잡지의 내용을 가지고 사경회를 인도한 것이 문제가 되어 상애원교회를 사임하였다.
193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줄곧 여수의 한센병 환자 요양원인 애양원(愛養院)의 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신사참배의 강요에 굴복하지 않은 이유로 1940년 체포되어 광복이 되어서야 출옥하였다. 그 뒤 다시 애양원교회에서 일하면서 1946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 10·19사건 당시 두 아들 동인 · 동신이 좌익 학생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두 아들의 살해에 가담했던 안재선이 체포되어 처형되려는 순간에 구명 운동을 전개하여 즉결 처분 직전에 있던 안재선을 구해 양아들로 삼았다. 1949년에는 국기배례가 우상숭배에 해당한다며 국기배례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주변에서 피난을 권했지만 한센병 환자 곁을 지키기 위해 거절하였다. 1950년 9월 공산당원에 체포되어 28일 밤 순천으로 끌려가던 중 미평에서 총살되었다.
상훈과 추모
사단법인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사단법인 민족지도자손양원목사기념사업회 등 복수의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있다. 1993년 여수 애양원 인근에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이 건립되었고, 2015년에는 경남 함안군에 위치한 생가 터에 손양원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 김광수, 『한국기독교인물사』(기독교문사, 1974)
- 김양선, 『한국기독교사연구』(기독교문사, 1971)
-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엮음, 『산돌 손양원의 목회와 신학』(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4)
- 이만열 편,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엮음, 『산돌 손양원 목사 자료선집』(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5)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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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일제 시대에 일본과 일본 식민지들의 주민들이 일본 천황이 있는 궁성 방향으로 고개를 숙여 절을 하던 예법.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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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정학이나 휴학을 하고 있던 학생이 다시 학교에 복귀하게 되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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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나병 환자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의료 시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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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무교회주의를 믿거나 주장하는 사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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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우리의 종교와 사상 자유를 억압하기 위하여 신사에 배례하도록 강요하던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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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억울하거나 안타깝게 어렵거나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된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벌이는 운동.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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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
: 재판 따위의 법적인 절차 없이, 바로 벌하거나 제재를 가하는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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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
: 국기에 대하여 예의를 갖추어 경의의 뜻을 나타내는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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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9
: 신 이외의 사람이나 물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는 일. 영물이나 주물(呪物)을 종교적인 대상으로 삼는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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