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산돌. 1902년 7월 7일 경상남도 함안에서 아버지 손종일(孫宗一)과 어머니 김은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적 이름은 손연준이었다. 1909년 아버지와 함께 기독교에 입문하였고 이후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1924년 정양순과 결혼하여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1950년 9월 28일 6·25전쟁 도중 공산주의자에 의해 순교하였다.
1915년 칠원공립보통학교 재학 중 주1를 거절하여 퇴학을 당했으나, 선교사 맥레이(Macrae, L.)의 항의로 주2. 1919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중동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아버지가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자 학업을 중단하였다. 부친의 출소 후인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가모 중학교(巢鴨中學校) 야간부 속성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일본에 있는 동안 나카다 쥬지(中田重治)에게 큰 감화를 받고 참된 신앙의 의의를 체득하였고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1926년 경남성경학원에 입학하였고 부산 감만동에 있던 부산 주3 내의 상애원교회(감만리교회) 외지 전도사를 겸했다. 경남성경학원에서 초량교회의 목사 주기철(朱基徹)과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 경남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울산 방어진교회 · 남창교회 및 양산의 원동교회 등에서 순회전도사로 활동하였다. 김교신을 비롯한 한국의 주4들이 간행하던 잡지 『성서조선』을 구독하였으며 이 잡지의 내용을 가지고 사경회를 인도한 것이 문제가 되어 상애원교회를 사임하였다.
193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줄곧 여수의 한센병 환자 요양원인 애양원(愛養院)의 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주5의 강요에 굴복하지 않은 이유로 1940년 체포되어 광복이 되어서야 출옥하였다. 그 뒤 다시 애양원교회에서 일하면서 1946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두 아들 동인 · 동신이 좌익 학생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두 아들의 살해에 가담했던 안재선이 체포되어 처형되려는 순간에 구명 주6을 전개하여 즉결 처분 직전에 있던 안재선을 구해 양아들로 삼았다. 1949년에는 주8가 주9에 해당한다며 국기배례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주변에서 피난을 권했지만 한센병 환자 곁을 지키기 위해 거절하였다. 1950년 9월 공산당원에 체포되어 28일 밤 순천으로 끌려가던 중 미평에서 총살되었다.
손양원은 극적인 사랑과 화해, 용서를 실천한 인물로 기독교계에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일대기가 출판되어 영어와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었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사단법인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사단법인 민족지도자손양원목사기념사업회 등 복수의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있다. 1993년 여수 애양원 인근에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이 건립되었고, 2015년에는 경남 함안군에 위치한 생가 터에 손양원 기념관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