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중화 출신.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897년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세례교인 중 한 사람인 이성하(李成夏)와 최일형(崔鎰亨)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1898년에 세례를 받았고 1900년부터는 조사(助事)가 되어 북 장로회 리(Lee, G.) 선교사와 함께 중화·대동·곡산 등지를 순회하며 목회활동을 하였다.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김찬성(金燦星)이 인도하는 300여 학생들이 참석한 숭덕학교(崇德學校) 기도회에서 솔선하여 통회 자복하였다.
이로 인하여 장로교와 감리교의 학생들 사이에 부흥운동이 확산되는 한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1911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여, 그 해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중화읍교회에 부임하였다.
이후 목회활동을 계속하다가 1934년 은퇴하여 평양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되어 일선목회 현장에서는 떠났으나, 신신학과 사회복음주의 및 사회주의의 이론을 비판하는 등 보수신앙을 수호하는 글을 통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1938년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일제로부터 주기철(朱基徹)·이기선(李基宣) 등과 함께 강경파로 지목되어 예비검속을 당하기도 하였다.
8·15광복 후 1947년 월남하였으며, 1948년에는 주일 선거 반대운동을 펴 선거 일자를 바꾸게 한 사실도 있었다. 6·25전쟁 중인 1950년 12월 대구로 피난하였고, 이후 사회와 교회에 대해 보수주의적 기독교의 입장에서 경고 및 회개를 촉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