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과부가 되어 방물장수로 생계를 꾸려가던 중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閔氏)에 의하여 고종의 유모가 되었다.
고종이 즉위한 뒤 민부대부인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여 1864년(고종 1) 주교 베르뇌(Berneux)에게 고백성사를 받았다. 1865년(고종 2) 러시아함대의 남하로 조정에서 프랑스세력을 끌어들여 견제하려 하자 이를 눈치 챈 부대부인의 심부름으로 홍봉주(洪鳳周, 토마스)와 남종삼(南鍾三, 요한)에게 상황을 전해주었다.
이로 인하여 대원군과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질 듯 보였고, 신자들은 천주교신봉의 자유를 곧 얻게 될 듯 기뻐하였으나, 러시아세력의 후퇴로 대원군의 방아책(防俄策)도 바뀌게 되었다.
한편, 1865년 12월 북경(北京)으로 간 조선사절단으로부터 영불연합군의 중국침략과 중국에서의 서양선교사들에 대한 살해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대원군의 선교사들과의 교섭을 공공연하게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원군이 굴복하여 천주교 박해정책을 시행함으로써 병인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난이 일어나자 강원도 홍천으로 피신하였으나 곧 수양아들 이성칠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된 뒤 1868년 2월 참수형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