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익록(康益祿)은 1903년 10월 10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강우문과 김약로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사망 시기는 미상이다.
만주 지역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1922년 8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9월 대한통의부 제2중대 소위인 이진무는 국내에 들어와 김기보의 추천을 받아 강익록을 만나 독립운동을 권유하였고, 이에 강익록은 통의부에 가입하였다.
이들은 10월 선천의 금광제련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관리로부터 권총을 탈취하는 한편, 주민들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12월 17일에는 노원근의 집에서 이진무와 함께 선천 남면 삼봉주재소를 습격하기로 협의한 뒤, 삼봉주재소 한국인 순사의 집에서 총기와 실탄 등을 확보한 후 12월 19일 삼봉주재소를 공격하여 일본인 아먀모토〔山本〕 순사에게 총상을 입히고 건물을 방화하였다. 이후 1925년 1월까지 노원근 · 김문학 · 방원국 등의 집에서 지내며 각처에서 한국인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하였다.
일제 경찰은 정주에서 김문학 등을 체포하여 조사하는 과정에서 강익록이 연루된 것을 확인하고, 그를 추적하기 시작하자 일본 도쿄로 건너가 자강사(自彊社)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선천경찰서로부터 정보를 받은 현지 경찰이 1925년 5월 자강사를 급습하자 총격전을 벌이며 저항하였지만 결국 체포되었고, 국내에서 파견된 경찰에 인계되어 압송되었다.
삼봉주재소 습격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검거된 인원은 10인이었다. 9월 노원근 등 동지들과 함께 11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살인미수, 주거 침입, 강도, 강도 방조, 방화 등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때 검사는 “너희 같은 불량배는 아주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녕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라면서 무기징역을 구형하였고, 강익록은 “무기가 아니라 사형도 좋다.”라면서 만세를 외쳤다. 동지인 노원근은 징역 10년, 차운흥은 징역 7년, 김기보는 징역 3년, 김문학은 징역 3년, 방원국은 징역 1년, 이명상은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강익록은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6년 2월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41년 4월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201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