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진(楊星鎭)은 1876년 5월 28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으며, 사망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양성진은 1906년 11월 황해도 안악에서 교육 장려, 민지계발(民智啓發), 산업 증진 등을 목적으로 최광옥 · 김홍량 · 최명식 · 임택권 등과 함께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면학회(勉學會)를 조직하여 서기로 선임되었다. 면학회에서 1907년 설립한 면학서포(勉學書鋪)의 운영을 맡기도 하였는데, 이 서점에서는 황해도 각지에 도서를 공급하고 판매 대금은 면학회의 도서 구입에 사용하였다. 1908년 면학회의 후신인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에서 활동하는 한편, 1909년에는 서북학회(西北學會)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10년 8월 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자 안중근(安重根)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安明根)은 국내에 잠입하여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안명근은 11월 송화와 신천의 부호들을 찾아 모금하였고, 12월 양성진은 고봉수 · 박형병 · 한정교 등과 함께 원행섭(元行燮)의 집에서 안명근을 만나 안악의 부호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데 동의하고, 읍내 부호의 명단과 헌병분견소의 위치, 거주 일본인의 인원 등을 조사하였다. 당일 이들은 교외 남산 습락현에서 다시 모였으나, 인원이 충분하지 못하여 일단 해산하면서 거사를 연기하였다.
그러나 1911년 1월 군자금을 보관하던 배경진이 체포되었고, 안명근도 조선 천주교의 수장인 뮈텔(한국명 민덕효) 주교의 밀고로 평양에서 검거되었으며, 이후 양성진 등도 체포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조선 총독 암살 모의사건으로 조작하였고, ‘안명근사건’ 또는 ‘ 안악사건(安岳事件)’으로 불린 이 사건으로 황해도 일대의 애국지사 160여 명이 검거되었으며, 사건은 단 2회의 재판으로 종결되었다. 일제는 이와 별도로 신민회 중앙 간부인 양기탁 등을 체포하여 이른바 ‘ 신민회사건( 105인사건)’으로 확대시켰다.
양성진은 1911년 7월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강도 및 강도 미수 혐의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경성공소원에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9월에 기각되었고,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지만 10월에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두 차례 감형되어 1915년 7월에 가석방되었다.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