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명근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안중근의 사촌동생으로, 군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되어 105인 사건의 발단이 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9년(고종 16)
사망 연도
1927년
본관
순흥(順興: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출생지
황해도 신천
관련 사건
안악사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안중근의 사촌동생으로, 군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되어 105인 사건의 발단이 된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순흥(順興). 황해도 신천 출신. 안중근(安重根)의 사촌동생이다. 어려서부터 안중근의 감화를 받고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고, 이승훈(李昇薰)·김구(金九) 등 신민회(新民會) 계통의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9년 10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포살사건이 있은 뒤에, 이완용 등을 총살하고 북간도로 가서 양병학교(養兵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배경진(裵敬鎭)·박만준(朴萬俊)·한순직(韓淳稷)과 자금 모집을 추진하였다. 1910년 11월 황해도 송화의 신석효(申錫孝)로부터 3,000원, 신천의 이완식(李完植)으로부터 6,000원을 얻고, 신천의 민병찬·민영설 등에게 10만원을 요구하여 준비해 놓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왔다.

그러나 민병찬·민영설 등이 재령 헌병대에 밀고하여 이해 12월 평양에서 붙잡혔다. 뒤이어 군자금을 보관해두었던 배경진과 박만준·한순직·원행섭(元行燮) 등이 붙잡혀 모두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것이 안명근사건, 즉 안악사건의 발단이었다.

안명근의 자금 공작은 당시 활발히 진행되던 황해도에서의 애국계몽운동[비밀결사 신민회의 사업의 일환], 특히 교육운동과는 무관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운동을 정치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그 관련성을 자백받고자 70여 일간 고문, 회유했으나 끝내 부정하였다.

그렇지만 일제는 안악을 중심으로 160여 명의 요시찰자를 붙잡아 ‘내란미수·모살미수·강도 및 강도미수죄’를 날조하여 18명을 재판에 회부하고 그 밖의 40여 명은 거주를 제한하였다. 대부분 궐석재판으로 이루어진 판결 결과는 안명근 종신형, 김구를 비롯한 7명은 15년형 등이었다.

안악 일대에 대한 정치적 탄압은 평안남북도로 연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신민회 조직이 탄로나고 일제가 이들을 데라우치총독 암살음모사건이라는 날조된 사건에 연루시켜 105인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안명근은 10년간 복역 후 출옥,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길림성의 의란현(依蘭縣) 팔호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 광복출판사, 1985)
『기려수필』(송상도, 탐구당, 1974)
『안악사건과 3·1운동과 나』(최명식, 긍허전기편찬위원회, 1970)
『한국통사』(한우근, 을유문화사, 1970)
『백범일지』(김구, 고려선봉사, 1947)
『朝鮮の開化思想』(姜在彦, 岩波書店, 1980)
집필자
신용하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