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규(申鉉圭)는 1888년(?) 충청북도 괴산에서 3대 독자로 출생하여 1928년 8월 12일 서울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순국하였다. 순국 당시 유족으로는 노부(老父)와 아내, 1남 2녀가 있었다.
신현규는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대한제국기 의병으로도 활동하였다고 한다. 1917년 11월 경상북도 문경에서 대구 출신 손양윤을 만나 1915년 7월 대구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였다. 1918년부터 채기중 등과 함께 경상북도 일대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출옥 후 5월 다시 손양윤을 만나 1925년 3월 북만주에서 조직된 무장투쟁 단체인 신민부(新民府)에 가입하였다. 손양윤은 1924년 만주로 건너가 신민부에 가입하고 다시 국내에 들어와 독립운동 자금 모금을 계획하고 있었다. 1927년 4월 신민부의 지시를 받은 이병묵이 국내에 들어오자 신현규는 이병묵 및 손양윤 · 손허 · 손봉현 · 윤창선 등과 함께 경상북도 일대에서 유지들을 대상으로 신민부에 전달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손양윤과 함께 1927년 6월 경상북도 칠곡의 일본인 집에서 현금과 엽총을 탈취하였고, 동료들과 함께 1928년 1~2월 왜관면, 3월 약수면, 4월에는 경산군 남산면의 한국인 부호들을 찾아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밀정에게 발각되어 1928년 7월 서울의 여관에서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28년 8월 12일 서울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수감 중 사망하였는데, 일제 경찰은 다른 수감자가 갖고 있던 아편을 몰래 먹고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의 사후 이 사건은 '신현규사건'으로 언론에 보도되었으며, 1929년 12월 손양윤이 징역 20년을 선고받는 등 동료들도 모두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200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충청북도 괴산군 보훈공원에 신현규 등 괴산 출신 18명의 독립유공자 명단이 새겨진 충렬탑이 2012년에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