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복회는 1915년 7월 대구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이다. 한말의병 계열과 계몽운동 계열이 연합 결성한 단체로,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조직된 광복단과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이 중심이 되었다.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치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초기에는 군자금 모집 활동에 주력했으며 친일세력들을 처단하는 의협투쟁도 전개했다. 1918년 총사령관 박상진을 비롯한 5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다수의 회원이 체포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국내 독립운동조직이던 대한광복회는 1920년대 광복단결사대와 주비단으로 계승되었다.
1910년대 독립을 목적으로 무장투장을 전개해 독립을 달성하려했던 대표적인 국내독립운동단체이다. 광복회는 1915년 7월 15일(음) 대구 달성공원에서 한말 의병계열과 계몽운동계열이 연합 결성한 단체로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조직된 광복단(光復團)과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이 중심이 되어 창립되었다.
광복회의 창립목적은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달성하는 것으로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무력이 준비되면 일제와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었다. 한인들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농토를 개간해 식량과 병력을 공급할 계획이었으며, ‘무력준비 · 무관양성 · 군인양성 · 무기구입 · 기관설치 · 무력전’이라는 투쟁방략을 세우고 군대식으로 조직을 편재했다.
광복회 창립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본부조직, 풍기광복단 · 민단조합을 중심으로 한 경북지역 조직, 달성친목회와 조선국권회복단을 중심으로 한 대구조직과 서북지역 조직이 참여했다. 조직은 본부에 총사령 박상진(朴尙鎭), 지휘장 우재룡(禹在龍) · 권영만(權寧萬)을 두었고, 그 아래에 재무부 · 선전부를 설치했다. 만주에는 이석대(李奭大)를 부사령으로 임명했으며 이석대가 순국한 이후에는 김좌진(金佐鎭)을 파견했다.
본부는 경주의 총사령 박상진가(朴尙鎭家)에 설치했으며 대구에 설치한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는 본부기능을 분담했다. 광복회는 본부조직을 바탕으로 국내 · 외로 조직을 확대하기 시작해 1915년 12월 우재룡이 길림(吉林)에서 주진수(朱鎭洙) · 양재훈(梁載勳) · 손일민(孫一民) · 이홍주(李洪珠) 등과 만주 본부 성격을 갖는 ‘길림광복회’를 설치했다. 경기도(지부장: 김선호(金善浩)) · 황해도(지부장: 이관구(李觀求)) · 강원도(지부장: 김동호(金東浩)) · 평안도(지부장: 조현균(趙賢均)) · 함경도(지부장: 최봉주(崔鳳周)) · 경상도(지부장: 채기중(蔡基中)) · 충청도(지부장: 김한종(金漢鍾)) · 전라도[지부장: 이병찬(李秉燦)] 지부도 설치했다. 경상도 · 충청도 · 황해도 지부가 가장 규모가 컸으며 활동도 활발했다.
국내 · 외에 연락기관도 설치했다. 국내에는 경상북도 영주의 대동상점(大同商店)을 비롯해 대구 · 삼척 · 광주 · 예산 · 연기 · 인천 등지에 상업조직으로 위장한 연락기관들을 설치했다. 연락기관들은 대부분 곡물상으로 설치되었으며 회원들의 집회장소 및 군자금 모집, 의협투쟁시 중요하게 이용되었다. 국외에는 중국 단동에 안동여관(安東旅館)과 삼달양행(三達洋行), 장춘(長春)에 상원양행(尙元洋行) 등 여관과 잡화상을 설립해 연락 거점으로 삼았다.
주요활동은 군자금 모집이었다. 창립목적인 독립전쟁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회원들이 자산을 기탁해 자금으로 활용했으며 일제가 거두어들인 세금을 탈취하기 위해 경주 광명리에서 우편마차를 공격하기도 했다. 대구지역 부호들을 상대로 자금을 모집하던 중 회원들이 체포되기도 했다. 일본인 소유 영월의 중석광과 운산 금광 수송마차를 공격해 자금을 확보하기도 했으며 화폐를 위조해 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전국의 부호들에게 통고문을 발송해 의연금 모집을 추진했으나 부호들이 협조하지 않아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광복회는 친일세력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자금모집을 원할히 하기 위해 친일세력들을 처단하는 의협투쟁도 전개했다. 의협투쟁은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에서 이루어졌으며, 식민지배에 안주하려는 친일세력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일깨웠다. 그러나 의연금 모집을 위해 발송한 통고문이 발각되고, 의협투쟁이 전개되면서 일제 경찰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1918년 1월 충청도 지부원들을 시작으로 주요 인물들이 체포되어 조직이 크게 와해되었다. 체포된 광복회원 중 총사령 박상진을 비롯해 김한종 · 임세규(林世圭) · 김경태(金敬泰) · 채기중이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했고, 다수의 회원들이 체포됨으로써 광복회는 큰 타격을 받았다.
광복회원들은 활동을 잠시 중단했으나 3 · 1 운동을 계기로 한훈(韓焄)을 중심으로 광복단결사대(光復團決死隊)와 우재룡을 중심으로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해 활동을 재개했다. 광복단결사대는 암살단과 함께 1920년 8월 미의원단 방문을 계기로 의거를 계획하던 중 발각되었으며, 주비단도 1920년 말 임시정부와 연계해 자금을 모집하던 중 발각되어 큰 활동을 펼치지는 못했다. 광복회원들은 1945년 8월 해방이 되면서 광복회 정신을 되살려 건국사업에 참여하고자 재건 조직을 결성하기도 했다.
광복회는 1910년대 독립전쟁을 실현하기 위해 국내에서 조직된 단체로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의 공백을 메우고 민족역량이 3 · 1운동으로 계승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한말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던 의병계열과 계몽운동계열이 연합했으며, 이념상으로도 복벽주의(復辟主義)와 공화주의(共和主義)가 통합된 단체였다. 광복회는 1920년대 광복단결사대와 주비단으로 계승되었으며, 광복회가 전개한 의협투쟁은 1920년대 의열투쟁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