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의 고관직에 있던 이민식(李敏軾)은 1910년 국권상실 이후 일제의 한국침략에 의분을 느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동지 장응규(張應圭)·여준현(呂駿鉉)·안종운(安鍾雲)·심영택(沈永澤)·조경준(趙景俊)·소진형(蘇鎭亨)·신석환(申奭煥)·이철구(李哲求)·정인석(鄭寅錫)·이규승(李奎承) 등과 함께 구체적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대한 원조와 연락을 담당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목표를 정하였다. 우선 실천 방안을 강구하였다.
지속적인 운동을 펴기 위해서는 비밀결사에 의한 독립운동단체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느껴 안종운과 의논하여 운영난으로 폐간 직전에 있던 『경성신문』을 매수하기로 하고, 그곳을 근거로 삼고자 하였다. 매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일부 잔액이 부족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 이민식 등 동지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장응규를 파견하여 임정 요인들과 의논하고, 같은 해 6월 비밀결사 조직에 착수하였다. 비밀결사의 이름을 주비단으로 정하고 심영택을 사령장, 안종운을 부사령장, 이민식을 참모장, 여준현을 재무부장, 장응규를 교통부장으로 선출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 소진형을 단장으로 선임하고 이민식을 사령장으로 바꾸며, 신석환을 참모장으로 하는 주비단 조직을 새롭게 구성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과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알렸다.
주비단이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이 독립운동 자금의 모금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산가을 설득하여 이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생각한 것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협박장을 보내는 등의 방법으로 자금을 조달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일부는 주비단의 활동자금에 충당하고 일부는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으로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모은 독립운동 자금은 6,000원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일본 경찰에 탐지되면서 더 이상 여의치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동지들 대부분이 잡힘으로써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