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한우석(韓禹錫). 자는 성초(聖初), 호는 송촌(松村). 충청남도 청양 출생.
1906년 홍주(洪州)에서 민종식(閔宗植)이 항일의병을 일으켰을 때 참가, 소모장(召募將)으로 홍주성 공격작전에 참전해 홍주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각지에서 의병을 소모해 1,000여 명의 대부대로 편성하였다. 그러나 뒤에 일본군의 공격으로 홍주성을 상실하고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1년 주권상실 후 귀국해 임병찬(林炳瓚)과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3년에는 채기중(蔡基中)·유장렬(柳璋烈)·김상옥(金相玉) 등과 함께 비밀항일결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 활동하였다.
1915년 박상진(朴尙鎭)·우재룡(禹在龍) 등과 합류해 광복단을 광복회로 개편, 강화해서 군대식 조직으로 편성하였다. 그 후 항일전을 전개하고 친일파 숙청활동을 하던 중 조직이 발각되자 재차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중국 상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해로 가서 정부요인과 협의한 뒤 권총·폭탄 등 무기를 가지고 국내에 잠입하였다. 1920년 국내에서 결성된 비밀항일결사인 암살단(暗殺團)과 합류하였다. 김상옥·김동순(金東淳) 등과 함께 당시 미국 국회의원단이 국내로 들어오는 것을 계기로 일본총독을 암살하고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을 파괴해 우리 민족의 독립열의를 세계에 알리고자 계획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22일 김상옥에게 무기를 전달하기 위해 가던 도중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8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 의병에 가입했던 사실이 탄로나 형이 가형되어 19년 6개월간의 복역생활을 하다가 출옥하였다. 6·25사변 때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학살당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