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고헌(固軒). 울산 출신. 승지 박시규(朴時奎)의 아들로, 큰아버지인 교리 박시룡(朴時龍)에게 입양되었다.
향리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세 되던 1902년부터는 의병장 출신으로 서울 평리원판사로 있던 허위(許蔿)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4년 양정의숙(養正義塾) 전문부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해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되었으나 사퇴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2년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해 독립운동의 연락 본부로 삼았다. 1915년 1월 안일암(安逸庵: 지금의 대구의 安逸寺)에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의 인사와 합작해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으로 취임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충청도·전라도·경기도·황해도·평안도와 만주 각지에 조직을 가지는 1910년대 국내 최대의 독립군 단체로 성장하였다. 박상진은 곳곳에 곡물상을 설립해 연락 거점으로 삼아, 일제 타도를 추진하는 행동 강령으로 비밀·폭동·암살·명령을 시달하였다.
박상진 등의 대한광복회는 이념에 있어서는 근대 국민국가의 공화주의를, 방략에 있어서는 무장혁명노선을 표방하였다. 박상진은 1916년 만주에서 무기와 화약류를 들여오다가 잡혀 6월간의 징역형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친일부호 처단을 여러 차례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917년 11월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임봉주(林鳳柱)·강순필(姜順必)에게 칠곡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게 하였다. 그리고 1918년 1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김경태(金敬泰)·임봉주(林鳳柱)에게 충청남도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게 하였다.
이 때 대한광복회 조직이 드러나 많은 사람이 투옥되었으며, 사형선고를 받았다.
1960년 울산에 추모비가 건립되었고 천안에도 광복회기공비가 세워졌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