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계는 1906년 조직된 천도교 장흥교구에서 활동한 그는 금융원 · 강도원 · 공선원 등의 직책을 거쳤으며, 1909년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설립한 사범강습소에서 천도교 교육을 받은 후 1913년 장흥교구장에 임명되었다.
1918년부터 독립 기원 49일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던 장흥의 천도교인들은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고 천도교 중앙총부 상임위원인 장흥 출신 신명희가 이 소식을 알려 오자 중앙총부에 500원을 전달하였다. 이어 김재계는 김재반 · 황생주 · 황업주 등과 만나 3월 15일 장날을 이용한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중앙에서 전달된 독립선언서를 천도교 각지에 배부하는 한편,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15일 그와 장흥의 천도교인들이 주도한 만세 시위는 큰 무력 충돌 없이 끝났으나, 이튿날부터 일경은 김재계를 비롯한 주도 인물들을 체포하였다. 장흥에서의 만세 시위는 4월까지 이어졌으며, 17명이 구속되어 김재계를 비롯한 10여 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이후 김재계는 민중 계몽을 위하여 1921년 사설 강습소를 설립하여 1930년 양성서당으로 인가받았다. 천도교 구파(舊派) 계열로서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 편집위원과 천도교 중앙총본부의 금융관장으로 활동하던 그는 1936년부터 중앙총본부의 밀지에 따라 「안심가(安心歌)」의 한 구절인 "개 같은 왜적 놈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일야간(一夜間)에 소멸하고 전지무궁(傳之無窮)하여 놓고 대보단(大報壇)에 맹세하고 한(汗)의 원수 갚아보세"를 외우며 일본의 멸망을 염원하는 '멸왜기도(滅倭祈禱)'를 드리다가 1938년 2월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70여 일만에 석방되었다.
이후 덕도에서 휴양하던 김재계는 1942년 6월 서울 중구에서 사망하였다.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50년대에 고향으로 이장되었고, 1978년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산 89번지로 이장되었다.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등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