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중직(宋重稙)은 1899년(추정)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하여 1928년 5월 1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송중직은 1919년 3 · 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상하이 임시정부 교통부에서 파견되어 황해도 송화 일대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있던 윤응념(尹應念)을 만나 독립운동 참여를 제안받고 이를 수락하였다. 윤응념은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이후 임시정부 교통부 참사가 되어 수차례 국내에 들어와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송화 신흥학교(信興學校) 교사로 재직 중이던 송중직은 1922년 4월 상하이 임시정부 교통부의 명령을 받아 중국인으로 위장하고 다시 국내에 들어와 권총과 실탄을 입수한 운응념을 만나 윤도중 · 이동진 · 최수연 등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이들은 인천 앞 도서 일대에서 유지들을 찾아가 자신들은 상하이 임시정부 독립단원이라고 밝히면서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500원 공채권(公債券)의 구매를 요청하였고, 협조하지 않으면 사살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들은 대부도에서도 같은 활동을 벌여 유지로부터 서약서를 받기도 하였다. 윤응념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락하기 위하여 일본인으로부터 선박을 구입하기도 하였다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동지들과도 함께 검거되었다. 이 사건은 세간의 이목을 끌으며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송중직은 1923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4년 1월 징역 6년으로 감형되었고, 12월 복막결핵으로 형집행이 정지되어 석방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1925년 8월과 10월에 강창교 · 김은성 · 김재도 · 이태형 · 임택종 등과 함께 황해도 송화와 은율 등지에서 다시 상하이 임시정부 요원이라고 자처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체포되었다. 1926년 1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8년 5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2014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