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안악 출신.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통분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김용제(金庸濟) 등과 함께 안악읍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설립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양산학교와 병행하여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있으면서 황해도 일대의 교육구국운동을 추진하고 지도하였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황해도 지회에서 가장 유력한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농촌개혁을 위해 사리원에 모범농촌을 건설할 계획을 수립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1910년 신민회가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 창건사업을 추진할 때, 김도희(金道熙)의 연락을 받고 김구(金九)·안윤재(安允在)·이승길(李承吉)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과 서간도 단체이주민 모집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12월, 8,500원을 기증하여 정달하(鄭達河)와 함께 만주 안동현(安東縣)에 농장과 무역회사를 공동 경영하면서 독립군기지 설립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뒤 황해도의 애국계몽운동가 160여 명이 검거된 안악사건(安岳事件)으로 인하여, 1911년 1월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8년간 복역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전향하여 일제의 침략활동을 지원하였다. 1939년 일본군 선전보도 업무를 맡았고 전시체제협력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1941년 임전보국단 평의원을 역임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나 친일행적이 드러나 2011년 4월 서훈이 취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