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자 조직에서 소외된 서울청년회계열의 서울파 중 구파에 속하는 이병의(李丙儀)·차재정(車載貞)·이영(李英)에 의해 1925년 10월 조직되었다.
서울파의 산하단체로는 사회주의자동맹·조선노동교육회·경성노동청년회·조선무산청년회·경성학생연맹·경기도청년연합회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과 적대관계에 있던 북풍회는 노동연맹회·무산자동맹회·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 뒤에 화요회로 개칭)·여자고학생상조회 등의 단체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서울파가 국내파인 것에 비하여 북풍회의 지도자는 일본유학생계열이라는 차이뿐 사상대립은 없었다. 그런데 조선공산당의 조직이 점점 크게 확대되어가면서, 당내외의 여러 파 사이에 항쟁이 노골화되어갔다. 특히 1·2차 조선공산당사건의 대탄압에 의해 중추적 지도 역량이 크게 약화되어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풍회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자, 전진회는 1926년 새로운 단체를 구성하여 북풍회를 압도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 때 대중동원력을 크게 상실한 부르주아민족주의 지도자 송진우(宋鎭禹)·김성수(金性洙)·최린(崔麟) 등이 공산당 측에 ‘민족협동전선’ 구축을 제안하였다.
이에 북풍회는 4단체 합동위원회를 구성, 정우회(正友會)를 발족하고 동경으로부터 귀국한 일월회(一月會)계열의 안광천(安光泉)·하필원(河弼源) 등을 ‘방향전환론’으로 설득하여 민족주의자와의 제휴에 찬성하는 ‘정우회선언’을 공표하였다. 그러나 전진회는 ‘검토문’을 발표, ‘개량주의적 우경론’이라고 배척하였다.
그 뒤 1927년 2월 정우회와 민족주의자에 의하여 신간회(新幹會)가 발족되자, 5월 16일 단일무산계급정당 결성을 목적으로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개회 첫날 이후 집회 금지를 당하여 붕괴되어 갔다. 또한, 정우회 주도하에 ML당(제3차조선공산당)이 결성되어 공산주의운동을 주도하자 전진회의 활동은 점차 쇠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