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연곡(蓮谷). 경기도 풍덕 출신. 경주 연곡(蓮谷)에서 성장하였다. 1871년(고종 8) 이후 가평에 거주하는 김평묵(金平默)과 유중교(柳重敎)에게 수학하였으며, 특히 유중교를 사사하였다. 동문 중에는 유인석(柳麟錫) 등 위정척사계열의 의병장이 많이 배출되었다.
1876년 홍재구(洪在龜) 등과 개항에 반대하는 척화상소(斥和上疏)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연곡의 원청대(遠淸臺)에서 학문을 강의하고 도를 논하였다. 1888년 어윤중(魚允中)이 관직에 천거하겠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속리산에 잠적할 뜻을 가졌고, 이듬해부터는 목천·충주·진천·아산 등지에서 강학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1895년 일제의 침탈이 심화되자 처세의 방법으로, 경전을 안고 입산하여 현실을 외면하는 것(抱經入山), 의거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것(擧義致對), 시세에 동조하는 것(從風隨俗)의 상·중·하 세 계책을 제시한 뒤, 자신은 경서를 정리하여 입산하였다.
이듬해 유인석이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노정섭을 청하자 이에 참가하려다가 패보를 듣고 되돌아왔다. 1900년 천안 백석리에서 강학하며 요동으로 망명을 기도하던 중 병을 얻어 좌절하고 백석정사(白石精舍)에서 죽었다.
당시 화서학파(華西學派) 안에는 유중교가 이항로(李恒老)의 심설(心說)을 보완한 데 대하여 김평묵이 비판하여 명덕(明德)과 심(心) 개념의 주리주기(主理主氣) 문제로 격렬한 논쟁이 있었는데, 노정섭은 이항로와 유중교의 입장이 모순된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되는 것임을 논증하였다. 저서로는 『연곡집(蓮谷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