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김중량(金仲亮). 평안북도 의주 출신.
1920년 김동식(金東植, 일명 金攸信)·한우종(韓禹鍾)·백운기(白雲起)·김도원(金道源)·조원세(趙元世)·박초식(朴楚植)·박종식(朴宗植) 등과 함께 의주군의 동암산(東巖山)에서 의용군을 모집, 훈련해 보합단(普合團)을 조직하였다.
단장에 추대된 뒤 총무 김동식, 재무 백운기, 선전 김도원, 소집 박초식·이광세(李光世) 등의 간부와 단원 500명을 지휘하였다. 행동지침은 각 지방의 부호들로부터 독립군 자금을 모집해 중국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고, 또 암살대를 조직해 군자금 제공을 거절하는 부호들과 이를 일본 관헌에 밀고하는 자, 그리고 한국인으로 형사로 근무하는 자 등 독립운동에 방해되는 자를 제거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모금한 군자금으로 화승총과 권총을 사들여 단원을 훈련시킨 뒤 평안북도 선천·철산·용천·의주 등지에서 식민지 행정기관의 파괴와 밀정 배숙청에 전력을 기울였고, 일본군과 수 차례 교전하였다.
같은 해 8월 용천의 박초식의 집에서 폭탄 11개를 제조해 군자금 모금에 활용하였다. 이어서 9월 단원 수십명을 인솔하고 선천군 내면 내산사(內山寺)에 주둔 중 간승(奸僧)의 밀고로 적의 기습공격을 받아 그 자신은 턱에 관통상을 입고, 많은 동지들이 피해를 입었으나 적 2명 사살, 5명 중상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부득이 동암산의 본거지를 버리고 남만주로 거점을 옮겼다. 이 때 이진(移陣)하던 중 압록강 건너편의 안둥하류(安東下流) 삼도구(三道溝)에서 일중연합군경의 포위를 당해 접전해 중국경찰 3명, 일본경찰 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단원의 인명 피해도 적지 않았다.
남은 병력을 수습해 서간도 관전현(寬甸縣)으로 가서 독립단과 합류, 그 지단장(支團長)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국내에 잔류해 서울을 중심으로 친일파 숙청작업을 하던 단원들이 대거 체포되고, 서간도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이 한계에 달하자 북경 방면으로 진출, 끝내 은신하였다.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