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김관성(金觀星). 평양 출신.
1919년 3·1운동 뒤 항일독립투쟁을 목적으로 장명환(張明煥)·이춘산(李春山) 등과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이때 그들은 간도지방의 교민단체인 한족회(韓族會)의 비활동성에 불만을 품고 현익철(玄益哲)·현정경(玄正卿)·이시열(李時說)·이호원(李浩源)·김석손(金碩巽)·홍원경(洪元京) 등과 함께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의 전개와 국내잠입작전의 수행을 위해 한 새로운 단체를 결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결과 1920년 2월 관전현(寬甸縣)을 거점으로 하는 광한단(光韓團), 일명 의흥단(義興團)을 조직하여 일제의 식민통치기구에 대한 저항과 친일파 숙청을 위한 활동에 진력하였다. 그해 7월 박민희(朴敏熙)와 함께 국내로 잠입하여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또, 11월에는 이명환(李明煥)과 모험대를 조직하고 국내로 잠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격문을 배포하였다. 그 뒤 이 사실이 드러나 일본헌병에 붙잡혀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22년에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입하여 검무감(檢務監)으로서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회덕현(懷德縣) 오가자(五家子)에서 요하농장(遼河農場)을 경영하여, 300여 가구의 우리 동포를 입주시켜 교민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였다.
아울러 그 곳 일대의 교민자제의 민족교육을 위한 교육기관과 청년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 노선상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공산당원에게 암살당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