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영변 출생.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 건너가 외국어학교를 3년 만에 졸업하고 귀국한 뒤 1909년 이후부터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남북만주와 시베리아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1910년 이후 광복단에 가입,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박은식(朴殷植) 등 30명과 선언서도 작성하였다. 항일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조선홍(趙宣弘) 등 30여 명과 같이 같은 해 4월 18일 톈진[天津] 시내 프랑스 조계 내에서 톈진불변단(天津不變團)을 조직, 항일투쟁의 구심점을 삼았다.
톈진불변단에서 단장 조선홍을 도와 부단장으로 활동하다 그 해 8월 15일에 단장이 되었다. 톈진불변단의 실질적인 핵심 책임자로서 상해임시정부의 광복정책에 협조하였으며, 중국의 독립운동에도 적극 협조하였다.
1920년대에는 국내로 들어와 민흥회(民興會)를 조직, 신간회(新幹會)와의 합작 통합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독립투쟁중 5년여 옥중에서 고생한 적도 있었다. 1945년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간부로 건국과 통일운동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며, 초대 심계원장(審計院長)을 역임하였다. 1950년 6·25 때 납북되었다.
1990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