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2월 17일 황해도 금천군(金川郡) 구이면(口耳面) 송천리(松川里)에서 태어났다.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3일 교내에서 학생들과 함께 독립가와 찬송가를 부르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개성은 3·1운동과 관련하여 조직적으로 직접 연결되지 않았지만, 경기도 내에서 3월 1일 이전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유일한 곳이었다. 당시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오화영(吳華英)은 남감리교 전도사 김지환(金智煥)을 통해 목사 강조원(姜助遠)에게 독립선언서 200장을 개성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이는 3월 1일 호수돈여학교 부설 유치원 교사 권애라(權愛羅, 18971973)의 주도하에 여전도사 어윤희(魚允姬, 18801961), 신관빈(申寬彬, 1885~?) 등에 의해 송도면 일대에 뿌려졌다. 이들 모두 호수돈여학교 출신이었던 만큼 후배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기에, 개성에서 가장 먼저 교내 만세시위가 전개될 수 있었다. 3월 3일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는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의 연대 시위로 발전하였고, 이는 3월 4일까지 이어졌다. 이때 나은주는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후 나은주는 금천군 백마면(白馬面) 장지리(長芝里) 장동(長洞)의 집으로 귀향하였다. 고향인 금천군의 만세시위는 4월부터 본격화하였다. 그가 살던 백마면에서는 4월 1일 노형근(盧馨根), 이상로(李祥老) 등의 주도로 80여 명이 용성리(龍城里)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시위는 일본 헌병 파견대의 저지로 이내 해산되었지만, 다음날인 4월 2일 오후 1시경 다시금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들 시위대가 이웃한 현내면(縣內面) 송정리(松亭里) 방면으로 행진하려 할 때, 나은주가 나서서 70~80명 앞에서 ‘조선 독립’에 관해 연설하였다. 이날 시위 역시 헌병들의 제지로 해산되었으며, 주민 몇 명이 체포되었다.
4월 3일 오후 2시경, 나은주를 포함한 300여 명의 시위대는 현내면 주재소로 가서 전날 체포된 주민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체포된 주민들이 이미 금천면 헌병분견대로 이송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해산하였다. 나은주는 이후 일본 헌병들의 주도자 검거 과정에서 붙잡혔다. 1919년 8월 21일 고등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면서 징역 1년이 확정되었고, 평양 모란봉 여감옥 7호실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1978년 1월 4일 사망하였다.
198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