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11월 10일 황해도 봉산군(鳳山郡) 서종면(西鍾面) 연비리(連比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2월 27일 천도교가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다음날인 2월 28일 33인 민족대표 가운데 한 사람인 감리교 목사 오화영(吳華英)의 동생 오은영(吳殷英)을 통해 개성군 송도면(松都面)에 사는 강조원(姜助遠) 목사에게 전달되었다. 강조원은 그날 밤 남부 예배당에서 신공량(申公良), 이강래(李康來), 오진세(吳鎭世), 최중순(崔重淳), 박용하(朴容夏), 손금성(孫金聲), 최규남(崔奎南), 이만규(李萬奎) 등과 만나 선언서 배부를 의논하였다. 하지만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어 배부가 보류되었고, 독립선언서는 북부 예배당 지하실의 석탄 창고에 숨겨졌다.
다음날인 3월 1일 아침 호수돈여학교 부설 유치원의 교사로 있던 권애라(權愛羅)는 경성에서 온 독립선언서가 배부되지 않은 사실을 알고 호수돈여학교 서기 신공량을 다그쳐 북부 예배당에 숨겨진 독립선언서를 꺼냈다. 그리고 전도사 어윤희(魚允姬)와 의논하여 독립선언서 배포를 준비하였다. 이후 어윤희는 자신과 함께 호수돈여학교 내 남감리교 기숙사에 살고 있던 전도사 신관빈을 찾아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자고 권유하였고, 신관빈도 동의하였다. 신관빈은 오후 2시경 어윤희와 함께 송도면 만월정(滿月町) · 북본정(北本町) · 동본정(東本町) 일대에서 행인 수십 명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만기 출옥한 직후인 1920년 4월 18일 『동아일보』에 실린 「출옥자 감상문」에서 “사람으로는 받지 못할 만큼 망측한 대접을 받았다.”라고 감옥 생활을 회고하였다. 또한 ‘우리의 할 일은 학교를 많이 설립하여 청년남녀에게 교육을 많이 시키고 해외로 유학을 보내 인재를 양성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