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일제강점기 때,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상하이로 건너가 애국부인회 등에서 활약하며 항일운동과 여성지위 향상에 힘쓴 교육자·독립운동가.
인적 사항
주요 활동
1920년 4월 25일~5월 27일 동안 6회에 걸쳐 수표교(水標橋) 예배당을 비롯하여 정동(貞洞) 예배당에서 '반도의 희망', '잘 살읍시다' 등의 제목으로 한국 여성의 애국사상 고취를 위한 강연을 시도하다가 1920년 7월 9일 종로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 후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남감리교회(南監理敎會)가 운영하던 쑤저우[蘇州]의 징하이의숙[景海義塾]에 들어갔다. 한편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된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 1월 러시아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極東人民代表會議) 한민족여성대표(韓民族女性代表)로 참석하였다. 이곳에서 한국 대표로 참석한 김시현을 만나 결혼하였다.
1929년에는 중국 쑤저우 징하이여숙대학[景海女塾大學]에서 수학하면서 상하이를 중심으로 여성지위 향상과 조국 광복운동에 활약하였고, 이후 동삼성(東三省)에서 지하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42년 4월에는 지린성[吉林省] 시가둔(施家屯) 영신농장(永新農場)에서 아들 김봉년(金峰年)과 함께 일제 관동군 특무대에 붙잡혀 1년 이상 비밀감옥에서 고문 취조를 받은 다음, 창춘고등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2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창춘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1966년 1월 남편 김시현이 사망한 후, 1967년 6 · 8선거에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후보로 경상북도 안동에서 출마하기도 하였다. 1973년 10월 22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단행본
- 김희곤, 『김시현』(지식산업사, 2013)
- 『독립유공자공훈록』 9(국가보훈처, 199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국가보훈처, 1971)
판결문
-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 7. 4.)
-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 5. 30.)
인터넷 자료
-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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