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손병희가 보낸 독립선언서 80매를 어윤희(魚允熙) 등과 함께 개성군 송도면에서 배포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5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고, 7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9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5일~5월 27일 동안 6회에 걸쳐 수표교(水標橋) 예배당을 비롯하여 정동(貞洞) 예배당에서 ‘반도의 희망’, ‘잘 살읍시다’ 등의 제목으로 한국 여성의 애국사상 고취를 위한 강연을 시도하다가 1920년 7월 9일 종로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 후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남감리교회(南監理敎會)가 운영하던 쑤저우[蘇州]의 징하이의숙[景海義塾]에 들어갔다. 한편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된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 1월 러시아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極東人民代表會議) 한민족여성대표(韓民族女性代表)로 참석하였다. 이곳에서 한국 대표로 참석한 김시현을 만나 결혼하였다.
1929년에는 중국 쑤저우 징하이여숙대학[景海女塾大學]에서 수학하면서 상하이를 중심으로 여성지위 향상과 조국 광복운동에 활약하였고, 이후 동삼성(東三省)에서 지하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42년 4월에는 지린성[吉林省] 시가둔(施家屯) 영신농장(永新農場)에서 아들 김봉년(金峰年)과 함께 일제 관동군 특무대에 붙잡혀 1년 이상 비밀감옥에서 고문 취조를 받은 다음, 창춘고등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2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창춘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1966년 1월 남편 김시현이 사망한 후, 1967년 6 · 8선거에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후보로 경상북도 안동에서 출마하기도 하였다. 1973년 10월 22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