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9월 22일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창안리 217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4일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葛山面) 양근리(楊根里) 시장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신규(李藎珪)가 주도하였으며, 곽영준(郭英俊)은 독립선언서와 격문 각 수백 매를 시장에 집합한 1,000여 명의 군중들에게 배부하고 그들과 같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행진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이신규와 함께 양평헌병분견소에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자, 시위 군중은 체포자를 석방하라고 외치며 폭력적인 시위운동을 벌였다.
1919년 7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았고, 1919년 10월 23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8일 출옥하여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음력 7월 13일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 천도교(天道敎) 교구실에서 양재은(梁在殷) 등과 회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독립운동자금의 모집 활동을 벌이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이때 양재은 등과 함께 대한신정부군자금(大韓新政府軍資金) 모집원 발령서 및 금원 수령서를 작성하였다.
1920년 7월 25일 용문면 다문리 김영각(金永珏) 등에게 1,000원의 출금을 요구하며 응하지 않으면 즉시 권총으로 사살하겠다는 협박을 하며 25원을 받았다.
1922년 1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대정 8년 제령7호 위반 및 강도죄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공소하였으나 1922년 3월 2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고, 1929년 3월 29일 출옥하였다.
1931년에는 양평군에서 양평농민조합준비회(楊平農民組合準備會)의 지제지부(砥堤支部) 면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32년 이후 양평적색농민조합에서 활동하였다.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