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창원(昌原) 출신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877년 8월 22일 아버지 김석진(金錫鎭)과 어머니 김동이(金東伊)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3일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鎭田面), 진동면(鎭東面), 진북면(鎭北面) 독립만세운동인 이른바 ‘삼진의거’는 변상태(卞相泰), 권영대(權寧大), 권태용(權泰容)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당시 변상태는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리(古縣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피신했던 사람으로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중앙총부(中央摠部)의 통령(統領) 윤상태(尹相泰)의 명령을 받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김수동은 이곳의 청년유지 변상섭(卞相攝), 황태익(黃泰益), 김영종(金永鍾), 구수서(具守書), 변상술(卞相述), 변우범(卞又範) 등과 함께 변상태와 연락을 취하며, 4월 3일 인근의 3개 면민들을 동원하여 진전면 양촌리(良村里)의 냇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1919년 4월 1일 변상태, 황태익 등과 함께 변우범의 집에 모여 회의를 한 후, 동리 서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여 미리 동리 사람들에게 배부해 주고, 인근 지역을 순회하며 민중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1919년 4월 3일 오전 9시 수천 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양촌리 냇가에 집결하였다. 변상섭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변상태가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면으로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이에 진동면에서도 가세하여 시위 군중은 5,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2시 시위 군중은 진북면 사동리(社洞里) 다리 앞에서 일본 헌병과 보조원 8명 및 재향군인 30여 명과 충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산(馬山)에서 출동한 일본군 야포대대 군인이 현지의 일본 헌병, 보조원, 재향군인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김수동을 포함한 시위 군중 8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22명이 부상당했다.
김수동은 변갑섭(卞甲燮), 변상복(卞相福), 고앙주(高昻柱), 김영환(金永煥), 이기봉(李基鳳), 김호현(金浩鉉), 홍두익(洪斗益) 등과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