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암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읍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5일 동래군 기장읍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뒤 체포되어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고문의 휴유증으로 병을 얻어 병보석되었다. 1920년 5월 1일 나이 20세로 순국하였다.
경상남도 동래(東萊) 출신으로 본관은 능주(綾州)이다. 1901년 2월 1일 아버지 구연경(具然慶)과 어머니 박정옥(朴貞玉)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3일 저녁 동래군 기장면 출신의 김도엽(金度燁), 권철암(權鐵巖), 김수룡(金壽龍), 최기복(崔基福), 이택규(李澤奎), 최창용(崔昌鎔) 등은 서재선(徐再先)이 김수문(金守文)이라는 마부가 동래에서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기장면사무소 재무 담당 서기 최창용 등과 함께 읽고, 4월 5일 기장읍 장날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3월 14일 최창용에게 인쇄판과 원지를 빌려 선언서 약 400통을 인쇄하였고, 한편 김도엽은 ‘양심발원 인도적 자유민족’ 및 ‘조선독립단’이라고 쓴 큰 깃발을 만들었다.
4월 5일 기장읍 장날,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1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일본 경찰이 공포탄을 쏘면서 위협하였으나 만세시위는 오후 5시까지 계속되었다. 그 뒤 4월 8일 노동자와 부인들이 주도한 만세시위와 4월 10일 기장공립보통학교 학생 김수룡 외 5명이 주도한 50여 명의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기장읍 장날 만세시위로 체포된 주도자들과 함께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5월 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공소하였다. 6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의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고문의 휴유증으로 병을 얻어 병보석되었다. 1920년 5월 1일 나이 20세로 순국하였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