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환(金智煥, 1892~1972)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일천(一泉)이다.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간사이대학〔關西大學〕 신학부에서 공부하였다. 졸업 후 귀국하여 개성에서 북부교회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22일에 민족 대표의 한 사람인 오하영(吳夏英)이 개성으로 찾아와 기독교계가 일본 정부에 제출하려는 독립청원서에 서명할 사람들을 모으자는 제안을 하자 이에 찬성하였다. 2월 27일 경성(지금의 서울특별시)의 이필주 목사 사택에서 1차로 선발된 기독교계 민족 대표 11명에 5명을 추가로 선정할 때 예정자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2월 28일 이승훈과 함태영으로부터 파리평화회의에 보낼 「독립의견서」와 미국 윌슨대통령에게 보낼 「독립청원서」, 그리고 민족 대표들의 서명을 날인한 문서를 건네받고 이를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던 현순(玄楯)의 처에게 우편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먼저 만주 안동현(安東縣)에 있는 김병농 목사를 만나기로 하였다.
3월 1일 서울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을 출발하여 신의주에 도착하였으나, 경찰의 감시가 심하여 걸어서 압록강 철교를 건너 단둥〔丹東〕에 도착하였다. 김병농 목사에게 우편물 발송을 부탁하러 갔으나 마침 집에 없어 아들에게 발송을 부탁한 뒤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도보로 남만주의 백마역에 이르러 기차를 기다리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다가 1920년 10월에 무죄 석방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