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 출신. 선천적인 무관성격으로 20세에 한국군대에 입대, 단시일에 승진하여 장교로 8년간 복무하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으로 한국군대가 해산되자, 군생활을 청산하고 남대문에 있는 상동예배당의 전덕기(全德基)목사를 중심으로 한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에 가입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하여 일주일간 단식하고 두문불출하였다. 종로청년회관(YMCA) 초대 체육교사로 재직하다가, 상동공옥소학교(尙洞攻玉小學校)의 체육교사로 전임하여 애국정신과 광복의 큰 뜻을 청소년에게 가르쳤다.
또, 모범적인 기독교신자로서 미신타파와 계급차별의 배격 등 신생활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뒤 신학교를 마치고 목사가 되어 정동교회에서 목자생활을 하며 조국독립에 대한 이상을 품고 이상재(李商在)·최병헌(崔炳憲) 등과 친분을 두터이 하였다.
3·1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이 구체화되던 1919년 2월 27일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李昇薰)·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 등 기독교측 대표들과 만나, 함태영(咸台永)이 최린(崔麟)으로부터 가져온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 초안을 회람하고, 기독교측 민족대표로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로 하였다.
같은 달 28일 밤 재동 손병희(孫秉熙)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최종적으로 독립운동 전개에 따른 계획을 검토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서울의 여러 교회에서 종교활동과 육영사업에 힘썼으며, 말년에는 수원 남양교회를 맡아보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