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벽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개성 호수돈여학교와 강원도 양양군 양양면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895년
사망 연도
1975년
출생지
강원도 양양군
주요 경력
영명학교 교사, 정명학원 설립
대표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관련 사건
3·1운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조화벽은 일제강점기 개성 호수돈여학교와 강원도 양양군 양양면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호수돈여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전개된 1919년 3월 3일 개성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이어 독립선언서를 고향인 양양군 양양면에 전달하여 4월 4일 남문리 장터 만세시위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이후 영명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며 유관순의 두 동생을 돌보았으며, 1923년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과 결혼하였다. 1932년 고향으로 돌아가 정명학원을 설립하고 남편의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정의
일제강점기, 개성 호수돈여학교와 강원도 양양군 양양면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
인적사항

1895년 10월 17일 강원도 양양군 양양면 상왕도리(上旺道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양양교회 전도사 조영순(趙英淳), 어머니는 전미흠이며, 외동딸이다.

주요 활동

1910년 원산 성경학교에 입학하여 2년 과정을 마치고, 1912년 원산 루씨여학교(樓氏女學校) 초등 과정에 입학하였다. 얼마 뒤 개성 호수돈여학교로 진학하여 보통과와 고등과를 마쳤으며, 1919년 4월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호수돈여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3일 개성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충교교회(忠橋敎會) 목사 강조원(姜助遠)에게 8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호수돈여학교 출신의 남부소학교 교사 권애라(權愛羅)는 조화벽을 비롯한 17명과 함께 '호수돈 비밀결사'를 결성하고 3·1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극비리에 기숙생 70여 명에게 서명을 받는가 하면, 커튼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약속한 3월 3일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이 독립가와 찬송가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는데, 여기에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과 일반 민중들도 동참하여 시위대의 수는 1,000여 명에 달하였다. 다음날인 3월 4일에도 호수돈여학교와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시민 600여 명과 함께 시위를 이어 나갔다. 이에 일제는 3월 5일 개성 시내의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이후 조화벽은 직접 필사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개성역에서 열차를 타고 원산에 도착한 뒤, 다시 배를 타고 강원도 대포항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일본 경찰에게 검문당하고 심문을 받았지만, 가죽 가방 안 버선목 솜 사이에 숨겨놨던 독립선언서는 발각되지 않았다.

조화벽은 필사본 독립선언서를 면사무소 급사로 일하고 있던 김필선(金弼善)에게 전달하였다. 김필선은 김재구(金在龜), 김규용(金圭容) 등과 함께 양양 장날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이들은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를 복사하고, 곳집에 숨어 태극기를 만들었다. 약속한 4월 4일 양양면 남문리 장터에서 지역 유림, 양양보통학교 동문, 양양 지역 교회 신도, 농민 등이 연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양양 3·1운동은 4월 9일까지 지속되었고, 13명의 사망자와 7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가 만세시위 주도자와 참여자들에 대한 체포를 시작하자, 조화벽은 한동안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이후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마친 조화벽은 1919년 가을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곳에서 고아가 된 유관순(柳寬順)의 두 동생 유관복(柳寬福)과 유관석(柳寬錫)을 돌보았으며, 유관순의 오빠인 유우석(柳愚錫)과 1923년 4월 18일 결혼하였다. 유우석은 영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4월 1일 공주 지역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조화벽과 결혼하던 1923년에는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재학하며 조국수호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결혼 후 조화벽은 원산으로 옮겨가 진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유우석은 1927년 원산청년회를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 형을 구형받았다. 조화벽은 남편 출옥 후 1932년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함께 정명학원(貞明學園)을 설립하여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쳤다. 유우석은 1934년에 양양군과 강릉군을 중심으로 설악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다시 구속되었다. 조화벽 유우석 부부는 1945년 8월 해방을 맞이하자 함께 월남하였다. 유우석은 1968년 5월 28일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자택에서 숨을 거뒀고, 조화벽은 1975년 9월 3일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조화벽 부부의 유품 91점이 경기도 고양시 국립여성사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양양군은 2021년에 3·1운동 당시 시위대가 행진한 양양읍 남문리 16-5번지 일대 138m 구간에 ‘조화벽 거리’를 조성하였고, 2023년 12월에는 평생학습관 공원 사업지에 조화벽 동상을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입시 합격 발표」(『동아일보』, 1940. 3. 6.)
「공동구입을 목적한 양양부인상회 창립」(『동아일보』, 1937. 11. 30.)
「경북기군 구제금」(『동아일보』, 1929. 6. 21.)
「근우 원산지회 창립대회」(『조선일보』, 1929. 1. 13.)
「지방 집회」(『조선일보』, 1928. 5. 1.)
「석산 유치원 후원회 조직」(『동아일보』, 1928. 4. 9.)
「횡령코 피착」(『동아일보』, 1926. 11. 3.)
「원산청년회 위원제로 변경」(『조선일보』, 1926. 5. 9.)
「개성여교 총회」(『조선일보』, 1924. 11. 12.)
「동덕계 조직」(『조선일보』, 1923. 3. 25.)
「모임」(『동아일보』, 1922. 7. 31.)

단행본

송혜영, 『조화벽과 유관순: 양양 3·1운동의 주역 조화벽을 통해 본 유관순 그 후 이야기』(달아출판사, 2019)
『독립운동사 2: 삼일운동사 상』(원호처, 1971)
『독립운동사 9: 학생독립운동사』(원호처, 1971)

논문

김형목, 「유관순 일가의 ‘대들보’ 소산 조화벽의 인생역정」(『유관순연구』 27,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2022)
이재풍, 「이양 3·1만세운동과 구국여학도 조화벽」(『향토사연구』 19,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 2007)

신문·잡지 기사

「햇빛 본 지방 3·1만세」(『동아일보』, 1972. 2. 29.)
「고익회억 즐겨놓던 십장생의 수」(『조선일보』, 1961. 8. 26.)
「시내 뻐스 전복 9명 부상」(『동아일보』, 1956. 4. 28.)
「조선의 쟌다-크 유양 오빠도 현재 건국에 활약」(『경향신문』, 1947. 3. 7.)
집필자
이계형(국민대 교수, 한국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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