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옥금은 일제강점기 천안 양대리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사립 광명여학교 재학 중에 임영신, 한이순 등과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후 3월 17일 태극기를 제작하고 3월 20일에 학생 80여 명과 함께 양대리 장터로 나가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불어난 시위대와 함께 입장 장터로 향하던 중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920년 2월 7일 가출옥하였으며, 이후 호수돈여학교와 감리교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해방 후 조선여자국민당 상무간사를 역임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905년 9월 5일 충청남도 직산군 이동면 양대리[현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양대리]에서 민재오(閔載午)와 이재순의 5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1938년 김남식(金南植)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이명은 민옥금(閔玉今) · 민영숙(閔泳淑)이다.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스[C. Williams]가 세운 고향 양대리의 사립 광명여학교(光明女學校) 재학 중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당시 이 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임영신(任永信)은 동료 교사 강기형(姜琦衡), 재학생 민옥금, 한이순(韓二順), 황금순(黃錦順), 안시봉(安時鳳)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1919년 3월 20일 양대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한 뒤, 3월 17일에 학생들에게 만세시위의 취지를 설명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3월 20일 오전 10시경, 민옥금은 학생 80여 명과 함께 학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양대리 장터로 나갔다. 그러고는 거기에 모여 있던 300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양대리 장터에서 3㎞ 떨어진 하장리의 입장 장터로 향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참여자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시위대를 해산하려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민옥금은 머리에 둔기를 맞아 정신을 잃고 쓰러져 붙잡혔다. 이후 천안군 내 헌병대 유치장에 10일간 구금되었다가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19년 4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2월 7일 가출옥하였다.
민옥금은 가출옥 후 개성 호수돈여학교와 감리교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졸업 후 광화문교회에서 1년간 봉사하다 이천 양정여학교로 옮겨 7년간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후에는 4년 동안 서울에서 중학생 교육 및 사회사업 등에 종사하였다. 1945년 8월 해방 후 임영신 등의 발기로 조선여자국민당이 창당되자, 이에 입당하여 상무간사를 역임하였다. 1988년 12월 25일 사망하였다.
1986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