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승당(承堂). 금산 출신. 아버지는 임구환(任九桓)이며, 어머니는 김경순(金敬順)이다.
어린 시절 기독교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자랐으며, 1909년 고향의 심광학교(心光學校), 1914∼1918년 전주의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를 졸업하였다. 이후 1919∼1921년 일본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廣島基督女子專門學校), 1925∼1931년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과 대학원 등에서 공부하였다. 석사학위논문은 「한국불교도들의 기독교신앙으로 전향하는 길」이며, 1957년에 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18년부터 천안 양대학교(良垈學校)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19년에 전주에서 3·1운동에 참여했다. 1921∼1922년 공주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와 이화학당(梨花學堂)에서 교사로 근무했으며, 1933년부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무 등을 역임하였다.
1935년부터 중앙보육학교 경영을 맡게 되었으며, 1941년에 조직된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에 중앙보육학교 대표로 참여했다. 1942년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조직되자 김활란(金活蘭)·박순천(朴順天) 등과 함께 지도위원을 맡았다.
광복 후 1945년 10월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으며, 1946년 9월 중앙여자대학을 설립하여 학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9월 중앙대학으로의 개편과 학장 취임, 그리고 1953년 2월 중앙대학교 총장, 1961년 11월 중앙문화학원 이사장을 지냈다.
한편 1945년 10월 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으며, 1946년 2월에 설치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서 의원을 지냈다. 1948년 8월 상공부장관이 되었으나, 1949년 국회의원 보궐선거 때의 독직사건(瀆職事件)으로 기소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1949년 6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50년의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되었고, 1950년 2월 상공일보사(商工日報社) 사장, 1952년 여성계사(女性界社) 사장 등 언론계에도 관여하였다. 1961년 이후에는 대한여자청년단 단장, 1963년 민주공화당 총재고문, 1963∼1971년 대한부인회 회장, 1965∼1973년 교육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1966년 세계교직자연합회 회장이 되었고, 1969년 재건국민운동중앙회 부회장이 되었다. 1971년 민주공화당 고문, 1972∼1976년 국민회의 대의원과 운영위원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My Forty Year Fight for Korea』가 있다.
1977년 세상을 떠났으며 중앙대학교 교정에 유해가 묻혔다. 문화훈장 대한민국장과 미국 아이젠하워상·청조근정훈장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