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민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기생으로 활동하다 황해도 해주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
이칭
이명
문향희(文香姬)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903년
사망 연도
1925년
출생지
황해도 해주군
대표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관련 사건
3·1운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문재민은 일제강점기 기생으로 활동하다 황해도 해주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어린 시절 가난으로 인해 기생이 되었으며, 1919년 4월 1일 기생조합 동료들과 함께 황해도 해주군 해주 읍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태극기를 만들어 들고 행진하였고, 단상에 올라 연설도 하였다. 다른 기생들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4개월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는 학업에 전념하였다.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정의
일제강점기, 기생으로 활동하다 황해도 해주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
인적사항

1903년 7월 14일 황해도 해주군 송림면(松林面) 수압리(垂鴨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문향희(文香姬)이다.

주요 활동

아버지 문성관(文聖寬)이 가난하여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자, 13살 된 그를 해주 읍내의 기생 중매쟁이한테 당시 집 한 채 값에 해당하는 200원을 받고 팔았다. 이후 해주면 중리에서 기생으로 지냈다.

해주 지역에서는 1919년 3월 1일 읍내 남본정교회에서 만세삼창을 외친 이래, 3월 9일 읍내 남욱정(南旭町)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계획되었고, 3월 10일에는 천도교인들 주도하에 3천여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읍내에서 시작한 만세시위는 해주군 중부와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하여, 3월 9일에는 석동면(席洞面)과 서원리(書院里), 3월 10일에는 서변면(西邊面), 3월 12일에는 추화면(秋花面) 약현리(藥峴里) 청단(靑丹) 장터, 3월 17일에는 청룡면(靑龍面) 영양리(迎陽里) 등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문재민은 이러한 만세시위를 지켜보며 남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19년 4월 1일 오후 2시경 해주 읍내 종로에서 다시금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문재민은 기생조합 구성원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조합장 문월선(文月仙)을 비롯하여 김해중월(金海中月), 이벽도(李碧桃), 김월희(金月姬) 등과 함께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태극기를 만들고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3천여 명이 넘은 시위대는 동문을 거쳐 종로에 도착하였다. 이때 문재민은 단상에 올라 조선 독립을 역설하고, 격려문을 낭독하였다. 이후 시위대가 서문 쪽으로 향하려 하자 일제 헌병과 경찰이 강제 해산하였는데, 이때 그는 다른 기생 7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6월 26일 해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기생의 삶을 그만두고자 몇몇 인사를 찾아가 사정하였는데, 이를 딱하게 여긴 이들이 100원을 내놓아 기생 신분에서 벗어났다. 이후 해주 남본정교회 박계화(朴季和) 목사의 후원으로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技藝科)에 입학하였다. 이때 기명(妓名)으로 쓰던 향희(香姬) 대신 재민(載民)으로 이름을 바꾸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공부와 일을 병행하면서 몸이 연약해진 데다 폐병까지 겹쳐 1925년 12월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원전

「해주에 명성이 높던 문재민 양의 일생」(『조선일보』, 1925. 12. 13.)
『매일신보』(1919. 7. 1.)

단행본

이윤옥, 『서간도에 들 꽃 피다 3』(얼레빗, 2013)
『국내 3·1운동 Ⅰ: 중부 북부』(한국독립운동연구소, 2009)
『독립운동사자료집 14』(국가보훈처, 1978)
『독립운동사 2』(국가보훈처, 1971)
『독립운동사 3』(국가보훈처, 1971)
집필자
이계형(국민대 교수, 한국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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