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10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모펫(S. A. Moffett, 한국명 마포삼열) 선교사가 선교와 기독교적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평양에서 숭의여학교로 설립하였다. 수업연한 3년에 본과 3학급으로 편성하여 초대 교장에 배귀례(裵貴禮. M. Best)가 취임하였다. 1908년에 제1회 졸업생 5명을 배출하였으며, 당시의 교과목은 성경·한문·산술·지리·생물 등이었다.
1906년 9월 감리교 계통의 정의여학교(正義女學校)와 통합하였으나 1920년 5월 다시 분리되었다. 1927년 본과 5년과 보육과 2년으로 개편하여 본과는 중등교육을, 보육과는 전문교육을 실시하였다.
1911년 이후부터 일제가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의 일환으로 고등보통학교로 개편을 강요하였으나 종래의 경영방침을 고수하여 끝까지 개편을 거부함에 따라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1931년에 이르러 학력인정학교로 인가되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 신사참배 거부로 1938년 폐교되었으며, 이때까지 배출된 졸업생은 본과 581명, 보육과 154명이었다. 광복 후 1953년박현숙(朴賢淑)에 의해 서울 중구 남산동의 송죽원(松竹園)을 임시교사로 해서 숭의여자고등학교로 재개교하였다.
처음 3학급으로 출발하여 1954년서울 중구 예장동경성신사(京城神社)의 건물과 대지를 인수하여 교사를 이전하고 6학급으로 증설하였다. 1959년 주간 9학급, 야간 9학급, 1961년 주간 24학급, 야간 15학급, 1973년 주간 30학급, 야간 24학급으로 학급을 증설하였다. 2003년 3월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현재의 위치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송죽결사대(松竹決死隊)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자금을 마련하였고, 3·1운동 때는 시위군중이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또한, 결백회(潔白會)와 면려회(勉勵會)를 조직하여 자주·자강의 능력 배양에 힘썼으며, 순회전도대를 결성하여 전도와 농촌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조직된 합창단은 국내의 각종 음악 경연대회를 석권하고 1969년, 1975년 2차례에 걸쳐 음반을 제작하였다. 1963년에 창단되었던 병원합창단은 매주 새벽 병상의 환자를 방문하여 위문활동을 하였고, 동아방송이 주최한 방송콩쿠르에서 7회에 걸쳐 최우수 작품상·기획상·제작상·연기상을 수상하였다. 연극반은 1970년 숭의극예술연구회를 창설하여 다수의 공연을 가진 바 있다.
1959년에 창단한 빙상부·농구부·배구부는 국가대표급 선수를 다수 배출하였는데, 특히 농구부는 1965년 이래 대만·일본·싱가포르·미국 등에서 다수의 해외 원정경기를 가졌고, 1965년 대한체육회 선정 최우수 단체상, 제12회와 제15회 한국체육상(서울신문사)을 수상하였다. 또한 배구부도 1971년 제17회 최우수 단체상을 수상한 바 있다.
1983년『숭의 80년사』를 간행하였으며, 1971년 대만의 정수여자중학(靜修女子中學), 1980년 미국 남가주한국학교(南加州韓國學校)와 자매결연을 맺고 학생 교환방문 등의 교류를 하고 있다.
2009년 현재 30학급에 총 1,150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고, 교직원은 73명이 재직하고 있다.
교명인 숭의(崇義)는 성서에 근거하여 의(義)를 숭상한다는 뜻이며, 교훈은 ‘경건(敬虔)·충성(忠誠)·부덕(婦德)’이다.
현재 방송영상제작반·합창반·미술부·풍물반·웹디자인반·대외봉사반 등 40여 개 동아리가 활동하고 있고, 학예행사로 5월 복음성가 경연대회, 6월 동화 구연대회, 7월 향상미술전·합창경연대회, 9월 계발활동 발표회, 10월 사생대회, 12월 향상음악회 등을 개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