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에 내한한 헤이스머(Haysmer, 한국명 허시모(許時模))가 평안남도 순안에 있는 안식교에서 경영하는 한 병원의 원장으로 의료사업에 종사하고 있던 중, 자기 소유의 과수원에 무단침입하여 사과를 따 먹은 12세 된 어린이를 붙잡아, 두 뺨에다 염산으로 ‘됴뎍(도적)’이라는 글자를 써넣어 피부에 가시지 않는 상처를 남긴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을 그 지역의 일본인검사가 1년이 지나서야 문제로 삼아 입건하자 세상에 널리 알려져, 기독교청년회는 물론 안식교 내부에서도 그를 성토하는 비난이 거세졌다.
결국 안식교에서는 그를 병원장에서 해임하였고, 재판에서 3개월의 형을 받고 그 해 12월에 본국으로 추방되었다. 이로써 사건은 표면상 해결된 듯 하였으나 그 여파로 한국교회는 뜻하지 않은 시련과 수난을 겪게 되었다.
좌익계에서는 경성학생연맹이라는 단체의 성토를 통해서 종교의 치부만을 폭로시키며, 선교사들을 미국제국주의의 침략전위로 규탄하여 종교교육의 폐지를 주장, 반기독교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제국주의편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 상애회(相愛會)를 내세워 미국의 야만행위는 철저히 응징되어야 한다면서 조선의 권익옹호라는 미명 아래 대대적인 반미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하에서 미국의 선교사를 통하여 오히려 민족의식을 함양하여 애국운동의 동력을 공급받았던 한국교회로서는 이 사건의 전개과정에서 난처한 오해를 받아, 각 방면으로부터의 이간책에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허시모의 지나친 행동에 분개하면서도 공산주의자나 일제에게 선교사 공격의 구실을 더 이상 주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한국교회는 이 사건의 본질을 널리 해명코자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의 언론이 사설을 통하여 그릇된 여론을 민족정도(民族正道)로 유도함으로써 더 이상의 시련 없이 해결을 볼 수 있었다.
『조선일보』는 「우인(友人) 허시모」라는 제(題)의 글을 통하여 민족의 이간을 목적으로 하는 정략에 추수(追隨)하여 다년 간의 선전(善戰)과 우정을 적대시하는 경솔을 삼가자고 호소하였으며, 『동아일보』는 「왜 이렇게 떠드는고」라는 논설을 실어 공산주의나 일제의 정략을 냉소와 비판으로 논박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기독교에 비판적이었던 민족주의, 공산주의, 일제의 침략주의 등 각 진영에 조선교회와 미국을 공격하도록 빌미를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