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애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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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단체
1920년 일본 동경(東京)에서 조직된 친일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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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0년 일본 동경(東京)에서 조직된 친일 단체.
내용

박춘금(朴春琴)이 만들었으며, 이기동(李起東)이 총본부 회장을 맡았다.

3·1운동을 전후해 일본으로 노동 인구가 물밀듯이 몰려들자, 그들의 사상을 통제하고 단속할 목적으로 일본 정부 및 총독부가 사주하여 조직한 노동 단체이다. 일본 각지에 지부를 결성하여 한때 회원수가 10수만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 단체는 ① 인류 상애의 정신과 공존 공영의 본의에 입각한 일선 융화, ② 민족적 차별 관념의 철폐, ③ 조선인 노동자를 위한 정신적 교화와 경제적 구제 등을 목표로 내세웠다. 이를 위해 ① 조선인 노동자의 공동 숙박, ② 직업 소개, ③ 인사 상담, ④ 노동자 교육 등을 실시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일제 지배층의 조선인 노동자 예속 압박정책의 철저한 주구로서 노동자를 학대한 폭력·착취 기관이었다. 또한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때는 조선인학살 뒤처리를 위해 조선인 노동자 300명으로 노동봉사대를 조직, 일제의 주구 역할을 유감없이 수행하였다.

이후 일제 치안당국에 협력하면서 학살된 조선인의 시체 처리와 이재(罹災) 노동자 수용 등에 노력한 공을 인정받아, 일제의 물심 양면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1928년 재단법인을 구성하고, 재단 이사장으로 전직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인 마루야마(丸山鶴吉)를 영입하였다. 전일본적 조직 확대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이들은 회비와 기타 명목으로 조선인 노무자와 여공(女工)을 착취하면서 일본인 기업주편에서 폭력으로 노동쟁의를 압박, 파괴하였다. 1930년경에는 재일본노동자의 결혼을 주선한다는 명목으로 여공들을 납치, 불법감금·사형(私刑)과 더러는 겁탈까지 범하면서 노동자에게 팔아 넘겼다.

상애회는 우리 나라 안에서도 관권과 결탁하여 폭력을 휘둘렀다. 1924년 4월 친일 각 파의 유지 연맹을 비난한 ≪동아일보≫송진우(宋鎭禹)를 폭행하였다.

그 해 7월에는 하의도(荷衣島) 소작쟁의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농민측 청년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상애회는 1938년에 조직된 협화회(協和會)의 중심 세력으로 해체, 통합되면서 사라졌다.

참고문헌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강동진, 한길사, 1980)
『朝鮮人女工のうた』(金贊汀, 岩波書店,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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