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권이 취소된 ≪시대일보≫를 이상협(李相協)이 인수하여 ≪중외일보≫라고 제호를 바꿔 서울 명치정(明治町:지금의 명동) 82번지에서 1926년 11월 15일 창간하였다. 발행인 겸 편집인에 이상협, 자금은 백연기(白演基)가 수만 원을 투자하였다.
당시 신문의 월정구독료는 1원이 일반적이었는데,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의 편집국장을 역임한 이상협이 정가 60전의 ‘최량(最量)·최렴(最廉)’을 슬로건으로 내걸어 일대 진출을 기도하였으나, 재정상태가 악화되어 그날그날 신문을 발행하기도 어려웠다.
≪중외일보≫는 창간사에서 “대중의 충실한 동무로서 백의대중의 행복을 희구하여 진두에 나서는 척후자(斥候者)가 될 것을 원한다.”고 밝히고, 창간 2주년에는 “우리가 조선민족의 유형적·무형적 이익에 충실하여 그 건전한 발전을 조장하려는 일편단심의 구현”을 다짐하며 민족의 실질적인 대동단결론을 펴기도 하였다.
1928년 12월 6일자 사설 <직업화와 추화(醜化)>를 통하여 “중국의 배일운동은 국가회복의 시대사조에 의거한 애국심의 발로이므로 그들의 행위는 그 결과의 여하를 별문제로 하더라도 경의를 표할 가치가 있다.”고 하여 총독부로부터 무기한 발행정지 처분을 받았다가 1929년 2월 18일 해제되었다.
1929년 9월 26일(982호)부터 하루에 조간과 석간으로 나누어 8면을 발행하였는데, 시대의 감각을 일깨우고 문화적으로 낙오자이며, 경제적으로 파산자인 우리 민족에게 학술뿐만 아니라 가정생활에까지 서로 의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시사만화·질의응답·가정상의 등의 편집체제를 개편, 확대하여 다른 신문들을 앞질러가는 혁신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민족지는 자주 압수처분을 받았는데 이 신문도 예외는 아니어서 경영난으로 가뜩이나 허덕이던 회사로서는 감당하기 어렵던 차에 1929년 9월 경상남도 마산에서 무역업을 하던 안희제(安熙濟)가 출자하여 주식회사로 확대, 개편하고 취체역 사장에 안희제, 부사장에 이상협, 편집국장에 민태원(閔泰瑗)으로 진용을 쇄신하였다.
그러나 거듭되는 휴간과 총독부로부터의 기사삭제 등으로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어 1931년 9월 2일 주주총회의 해산결의로 자진 폐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