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제암리 참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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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참변 후 파괴된 민가
제암리 참변 후 파괴된 민가
근대사
사건
1919년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 행위로 일본 군경이 수원군 향남면(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 사는 민간인 20여 명을 학살하고 민가 30여 호를 불태운 참변.
내용 요약

수원 제암리 참변은 1919년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 행위로 일본 군경이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 사는 민간인 20여 명을 학살하고 민가 30여 호를 불태운 참변이다.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터의 만세운동에 제암리 마을 사람 몇 명이 참여하였다. 일본군 검거반이 4월 15일 제암리의 기독교와 천도교 신자 20여 명을 교회당에 모이게 한 다음 총칼로 학살하고 불을 질렀다. 교회당 안과 밖에서 28명이 살해되고 민가 31호가 불타버렸다. 학살의 현장 지휘책임자 아리다 중위는 세계 여론의 지탄으로 군법회의에 붙여졌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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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9년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 행위로 일본 군경이 수원군 향남면(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 사는 민간인 20여 명을 학살하고 민가 30여 호를 불태운 참변.
내용

1919년 3월 31일 제암리에서 가까운 발안(發安) 장터에서는 장날을 기해서 약 1,000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태극기를 세워 놓고 독립 연설회를 개최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거리를 행진하였다. 게다가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고 독립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인 4월 1일 밤, 주변 산봉우리 80여 곳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때문에 그곳에 살고 있던 일본인 부녀자와 어린이는 조금 떨어져 있는 삼계리(三溪里)로 피신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처럼 3월말을 전후로 만세 시위 운동이 맹렬히 일어나자, 몇 개의 일본군 검거반이 파견되면서 3 · 1운동에 대한 보복 행위가 시작되었다.

제암리에서는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다만 마을 사람 중 몇 사람이 발안장터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1919년 4월 15일(화요일) 오후, 일본군 보병 중위 아리다 도시오[有田俊夫]가 이끄는 보병 11명과 순사 2명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강연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천도교 남자 신자 20여 명을 기독교 교회당에 강제로 모이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돌연 출입문과 창문을 굳게 잠그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총칼로 학살한 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는데 불길이 5시간쯤 타올랐다. 이때 일본군은 불속에서 뛰쳐나오거나 길에 나왔다가 달아나는 사람에 대해 발포하거나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또 교회당으로 끌려간 한 남자의 부인은 일본 군경에 의해 자기집이 불길에 싸이게 되자, 이부자리를 끌어안고 마을 밖으로 뛰쳐 나오다가, 산 위에서 망보고 있던 일본군의 칼에 찔렸다. 그리고 다른 중년 부인은 교회에서 나는 총소리에 놀라 그곳으로 달려갔다가, 자기집이 불타오르는 것을 보고 되돌아 가는 도중에 일본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이와 같은 사건으로 교회당 안에서 22명, 밖에서 6명 등 모두 28명이 살해되었다. 그리고 일본군경이 지른 불로 민가 31호가 불타버렸다.

제암리 참변을 전해들은 미국 선교사이며 교육자인 언더우드(Underwood, H. H., 元漢慶)와 미국 영사관 직원 일행이 4월 16일 서울을 출발하여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생존자들은 먹을 것, 입을 것도 없이 겁에 질린 채 언덕 옆에 모여 있었고 살해된 시체와 불탄 집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언더우드는 현장에 모여 있는 생존자 일부를 만나 사건의 자세한 내용을 듣고서 참상을 확인하였다. 한편 4월 17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이며 선교사인 영국인 스코필드(Schofield, F. W.)가 현장으로 달려가, 생생한 참상을 사진에 담고, 목격자의 증언을 수록한 「수원에서의 잔악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미국으로 보냈다.

영국 영사 로이드 등도 각기 학살 현장에 가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였다. 또한 이후부터 침묵을 지켜오던 일본 내의 영자 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재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등도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이며, 사건을 상세히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또 일본기독교동맹은 뒤늦게나마 대표를 보내 참상을 조사하게 하였으며, 만행의 일단을 신문과 잡지에 실어 일본인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제암리 현장을 직접 찾아본 일본인 영문학자 사이토 다케시[齋藤勇]는 『복음신보(福音新報)』에 「어떤 살륙사건」이라는 장편시를 발표하여 일본 군경의 만행에 대한 지식인의 통분을 읊기도 하였다.

한편 제암리 학살사건의 현장 지휘책임자인 보병 제79연대소속 아리다 중위에 대한 처벌은 행위가 직무 집행상 온당하였다는 이유로 덮어두려고 하였다가, 세계 여론의 지탄을 받게 되자 7월 17일자로 군법회의에 붙여졌다. 그러나 아리다 중위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참고문헌

『3·1운동』(김진봉, 민족문화협회, 1980)
『한국독립운동사자료』5(국사편찬위원회, 1971)
『3·1운동50주년기념논집』(동아일보사, 1969)
『한국독립운동사』2(국사편찬위원회, 1966)
『한국독립운동사략』(김병조, 선언사, 1922)
『한국독립운동지혈사』(박은식, 유신사, 1920)
『The Case of Korea』(鄭翰景,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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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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