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신은 1885년 4월에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 알렌(Allen,H.N.)이 고종의 위촉으로 설립한 국립병원 광혜원(廣惠院)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 치료뿐만 아니라 학생을 선발하여 서양의술을 학습하게 하였는데, 1886년 3월에 일종의 의학실습교육으로 학생 16명을 뽑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광혜원은 그 뒤 제중원(濟衆院)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재정 및 운영이 곤란해지자 1893년 북장로회 선교본부에서 병원 일을 전담할 의사 에비슨(Avison,O.R.)을 파견하였다.
그는 1894년부터 조정과 관계를 끊고 선교부에서 전담 관리하는 병원과 학교를 재조직하였다. 1899년 4월에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03년에는 학교 내에 간호원양성소를 설치하였다.
1899년 미국에 있는 세브란스(Severance,L.H.)로부터 기증받은 기금으로 1904년에 병원을 신축하고 교육기관을 확장하여 의학교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08년 6월에 제1회 졸업생 7명에게 졸업증과 내과 및 외과 의사자격증을 주어, 이 졸업생들은 정부에서 정식 인정과 개업 면허장을 받기도 하였다.
1909년 7월에 교명을 세브란스의학교로 개칭하고 이듬해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 1명을 배출하였으며, 1913년에는 다시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면서 처음으로 인턴제도를 실시하였다.
그 뒤 1915년에 일제는 「사립학교규칙」 및 「전문학교규칙」을 동시에 공포하여 사립 고등교육기관의 인가를 어렵게 만들었으나,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여 재단법인을 설립, 1917년 5월에 사립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인가를 받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학생 대표 이용설(李容卨)을 중심으로 『삼일신문(三一新聞)』을 만들어 뿌리는 등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4월에 교명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변경하면서 본과 외에 연구과 · 별과 · 선과를 두었다. 당시의 수업연한은 4년이었고 학생수는 60여 명이었으며, 1924년에는 세브란스산파간호원양성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1927년의 통계에 따르면 4학급에 교원 22명, 학생 92명이었고, 1931년에는 학생수 154명, 1940년에는 학생수 221명으로 증가되었다. 한편 1930년대 말부터 일제의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이 가중, 기독교계 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와 선교사의 교육인퇴(敎育引退) 등으로 폐교위기에까지 놓이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1942년에 교명을 강제로 변경, 아사히의학전문학교로 개칭되었다가 광복과 함께 본래의 명칭으로 환원되었다. 1947년에 6년제 세브란스의과대학으로 개편되었으며, 1957년 1월에 연희대학교와 합병되어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로 발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