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전하여 널리 펴는 일을 뜻하는 기독교용어이다. 선교의 사명은 교회에 부여되어 있으며, 교회는 그것을 처음 설립한 그리스도의 명에 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에게 교회를 믿게 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우리나라는 18세기에 중국에서 전래된 천주교 서적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공식 선교사 파견은 1794년에야 이루어졌는데, 첫 선교사인 주문모 신부가 신유박해 때 참수당하는 등 가혹한 박해 속에서 교회가 성장했다. 1886년에 체결된 한불조약 이후 공식적인 선교의 자유가 주어졌다.
파견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missio’에서 따온 종교적 용어이다.
선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것에서 시작되며,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도(使徒)들의 파견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므로 선교의 의미 안에는 파견이라는 뜻과 함께 복음의 전파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오늘날 선교의 사명은 교회에 부여되어 있으며, 교회는 그것을 처음으로 설립한 그리스도의 명에 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에게 교회를 부식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각지에 선교단체를 설립하거나 선교사들을 파견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선교사들은 초대 교회 사도들의 계승자라 할 수 있다.
선교가 지향하는 목적은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인간을 해방시키고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를 사회구조면에서 본다면 독립된 그리스도적 공동체, 즉 교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설립된 교회는 또한 새로움과 젊음을 유지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하여 새 선교활동을 계속해야 한다. 다시 말하여 그리스도가 이 땅에 다시 올 때까지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 인간이 진실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정신에 따라 스스로의 생활을 변화시키려면 참된 회개, 즉 마음의 쇄신이 필요하게 된다. 이 쇄신을 인간들 마음에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선교의 주체로서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가 먼저 쇄신되어야 한다. 이 쇄신을 기반으로 한 복음전파 활동을 통해서 교회는 선교본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선교의 대상에는 인간이 이루는 여러 가지 사회관계, 즉 가정 · 사회 · 국가뿐만 아니라 인간활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정치 · 경제 · 문화 등 모든 분야가 포함된다.
이들 대상에 접근하여 복음을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포함되어 있는 지역사회의 성격을 정확히 분석, 파악해야 하고, 기존의 사회 · 문화 · 종교 등과의 꾸준한 대화도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하느님의 말씀을 토착화하는 일은 선교의 중요한 과제이다. 교회의 선교를 위임받은 사람들은 먼저 교육 · 의료 · 자선사업 등 대상지역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일을 해서 지역사회의 관심을 얻게 되는데 이를 예비선교라 하고, 직접 복음을 전달하거나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는 일을 직접선교라 한다.
우리나라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인 18세기부터이다. 그러나 당시에 있은 복음의 전래는 초대 교회의 복음전승이나 일반적인 선교, 즉 선교사의 파견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을 왕래하던 조선 사신들에 의하여 전래된 천주교 서적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라는 한문 천주교서에 담겨 있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일부 조선의 학자들이 수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특이한 복음전파를 가리켜 문서선교(文書宣敎)라 한다. 다만, 그 당시에 이미 중국 천주교회의 선교사들과 조선인들 사이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매개로 한 접촉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비록 나라 밖에서의 일이기는 하지만 조선에 대한 선교활동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선교가 그 뒤에도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계속 행하여졌다. 여기에서 마침내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李承薰)이 탄생하게 되었다. 1784년 이승훈의 영세 귀국으로 조선천주교회는 창설을 보게 된다. 그 결과 이승훈과 그의 동료들은 그리스도 복음의 전달자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활동은 공식적으로 파견된 사도로서의 선교는 아니었다. 한국 땅에서 정식으로 선교활동이 이루어진 것은 그로부터 훨씬 뒤의 일이었다.
1794년 조선 신자들의 청원을 받아들인 중국천주교회에서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조선에 파견한다. 바로 이 주문모 신부의 조선입국이 한국선교의 효시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이미 천주교회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고 있었으며, 따라서 주문모 신부의 선교활동은 처음부터 비밀리에 행하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주문모 신부와 초기 교회의 신자들이 행한 선교의 결과는 훌륭하여 1800년 무렵 신자 수는 약 1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주문모 신부의 선교활동이 조선당국에까지 알려지고, 이에 따라 1801년 신유박해 때 그는 스스로 체포되어 새남터[沙南基]에서 참수당하였다. 이로부터 30여 년 동안 조선에는 선교사들의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다.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1836년 말부터였다. 이 무렵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Societe des Missions Etrangeres de Paris) 소속 신부인 모방(Maubant, 羅伯多祿) ·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과 주교 앵베르(Imbert, 范世亨) 등 이었다.
바로 이들이 조선에 첫발을 들여놓은 서양인 선교사들이었다. 이에 앞서 로마교황청에서는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천주교회를 맡아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리고 1831년에는 조선 포교지를 중국천주교회로부터 독립시켜 조선대목구(朝鮮代牧區)를 설정함과 동시에 이 지역에 대한 선교를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는 그 뒤 1908년까지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을 단독으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의 활동은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기까지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흔히 박해라 일컬어지는 이 수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선 각지에 비밀교회(Crypto―Church)로서의 공소(公所)나 본당(本堂)들을 설립하였다.
그 결과 1850년에는 약 1만 1000명, 1865년에는 약 2만 3000명에 달하는 신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은 기해박해(1839) 때 3명, 병인박해(1866) 때 9명 등 모두 12명이 참수형이나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 가운데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한국인 성직자 양성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설립 당시부터 새 선교지역 신자를 선택하여 성직자로 양성한다는 점을 선교지침의 하나로 정해 놓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성직자 양성을 추진하여 1845년에 김대건(金大建) 신부를, 1849년에 최양업(崔良業) 신부를 탄생시켰다. 뿐만 아니라 조선 땅 안에서의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1855년에는 충청도 제천의 배론[舟論]에 신학당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66년 박해로 이 신학당은 곧 폐쇄되었고, 조선교회는 다시 선교사가 없는 시기를 맞이해야만 하였다.
박해당시 중국으로 피신한 세 명의 선교사들 중 리델(Ridel, 李福明) 신부가 1866년 9월 병인양요 당시 조선에 상륙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선교사들이 재입국하여 활동한 것은 1876년부터였다. 이 때 조선의 선교사로 다시 숨어들어온 사람들은 우선 폐허가 된 천주교회를 부흥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조선의 개항에 편승하여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1886년에 체결된 한불조약 안에 이에 관한 조항을 삽입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선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한불조약을 계기로 급격히 증가한 선교사들은 교세확대에 노력하는 한편, 박해로 인하여 단절되었던 여러 사업들을 재개하였다.
1885년에는 강원도 원주 땅[현재 경기 여주]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설립했다가 1887년 서울 용산으로 이전하여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1886년부터는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있던 성서활판소(聖書活版所)를 정동(貞洞)으로 이전하여 각종 서적들을 간행하였다. 그 밖에 갖가지 사회사업 · 교육사업 등도 활발히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선교활동의 결과로 교세가 급격히 확대되자, 조선교구의 제8대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1911년 조선대목구의 제8대 대목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1911년 조선대목구를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할하는 한편, 박해시대의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운동(諡福運動)도 추진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조선 땅에는 다른 천주교 선교단체들도 진출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09년에는 베네딕도회(Benedictine Order, 芬道會)의 한 갈래인 성베네딕도회 오틸리아 연합회의 독일 선교사들이 서울에 진출, 혜화동에서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회는 1920년 원산대목구(元山代牧區)가 신설됨에 따라 그 곳으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1922년에는 미국의 메리놀외방전교회(Maryknoll Missioners)가 교황청으로부터 평안도지역 선교를 위임받고 이듬해부터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이들의 활동 결과로 1927년에는 평양지목구(平壤知牧區)가 신설되기에 이르렀다.
이들보다 좀 늦은 1933년에는 아일랜드의 골룸바노외방전교회(Columban Farthers)의 선교사들이 전라도지역에 진출하여 선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937년에 설정된 광주지목구(光州知牧區)와 1939년에 설정된 춘천지목구(春川知牧區)를 담당하게 되었다. 1962년 한국천주교회는 정식교계제도를 갖추게 되어 기존의 대목구가 교구로 승격되었고 관구가 실시되었다.
이렇듯이, 천주교회 측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해 오는 동안 개신교(改新敎) 선교사들도 점차 한국에 진출하여 활동을 개시해 나갔다.
개신교 선교의 기원은 1832년 네덜란드의 선교사 귀츨라프(Gutzlaff) 목사가 황해도 · 충청도 등지의 해안에서 한문성서를 전파하고 선교활동을 한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선교의 맥은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1865년에 가서야 다시 조선 선교가 시도되었다.
즉, 1865년과 1866년 두 차례에 걸쳐서 영국사람 토마스(Thomas) 목사가 황해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두번째 조선 진출에서 자신이 타고 온 미국상선 제너럴 셔맨호(General Sherman號)가 화공을 당하여 전소됨으로써 순교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직접 한국 땅을 밟고 선교를 시도한 선교사들 이외에 한국 땅 밖에서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인들과 접촉한 선교사들도 있었다.
1865년 중국 산둥(山東)에서부터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聖書公會)의 윌리엄슨(Williamson, 葦廉臣) 목사, 만주 땅에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던 스코틀랜드출신의 매킨타이어 (McIntyre, 馬勤泰) 목사와 로스(Ross, 羅約翰) 목사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특히, 매킨타이어 · 로스 목사는 1874년부터 조선국경 가까이에서 조선인 5명을 만나 복음을 전하는 한편, 한글성서 번역에도 착수하였다. 그리고 1876년에는 이응찬(李應贊) 등 4명에게 한국 최초로 개신교 세례를 베풀었다. 이때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가 된 우리나라 사람들은 1884년부터 서간도 · 의주 등지에서 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에서 교회가 설립되어 활동을 개시한 사실을 알게 된 미국의 장로교 · 감리교 선교사들은 1880년대 초부터 조선선교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게 되었다.
우선 감리교회에서는 1884년 6월에는 가우처(Goucher) 목사의 부탁을 받은 일본 선교부의 매클레이(Maclay) 목사가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를 개시하였다. 그리고 장로교회에서는 1884년 9월 중국에 있던 알렌(Allen, 安連) 목사를 조선에 진출시켜 조선선교의 문을 열게 되었다.
그 뒤, 개신교의 여러 교파에서 선교사들의 조선진출을 적극 장려하여 선교활동은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미국 북장로교회에서는 알렌의 뒤를 이어 언더우드(Underwood, 元杜尤) · 모펫(Moffett) 등이, 남장로교회에서는 1892년 이래 테이트(Tate) · 레이놀즈(Reynolds) 등이 조선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캐나다 장로교회에서는 1898년 이래 그리어슨(Grierson) · 푸트(Foote) 등이,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회에서는 1889년 이래 데이비스(Davis) 등이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미국 감리교회에서는 1885년 이래 아펜젤러(Appenzeller, 亞扁薛羅) · 스크랜턴(Scranton) 등, 남감리교회에서는 1895년 이래 리드(Reid, 李德) 등이 조선에 진출하였다. 이 밖에 1891년부터 영국 성공회(聖公會)가, 1889년부터 캐나다 침례교회가 선교사들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처럼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진출하면서 선교사업의 중복과 지역의 이중 점유가 있게 되자,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교파별로 선교구역을 분할(Comity Arrangements)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게 되었다.
그 결과 1893년 ‘장로회 정체준수(政體遵守)의 선교부 공의회’에서 교파별로 구역을 분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는 그 자체가 구속력이 없는 협의사항이었으므로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 뒤에도 선교구역의 중복은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개신교의 선교사업은 그 자체의 목적을 이루어 나갔을 뿐만 아니라 한국근대사회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들이 선교활동에서 우선 내세운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서 안에 담겨져 있는 말과 글로써 전파한다는 문서선교(文書宣敎)였다.
아울러 그들은 사회사업 · 의료사업 · 교육사업 등의 예비선교를 통하여 한국인과 친숙하고자 노력하였고, 이러한 활동이 교세의 확대에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일제시대 한국민족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펴나간 독립정신의 고취와 독립운동의 지원은 높이 평가할만한 것이었다.
1930년대까지 한국인들에 대한 그리스도 복음의 전파 주체는 외국선교단체와 그 선교사들이었다. 그러나 한국인 성직자들이 성장해감에 따라 선교사들의 활동범위는 그만큼 축소되어 갔다.
선교의 궁극적 목적인 하느님의 나라 건설은 이제 한국인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선교사들은 그 보조자로 변모되어간 것이다.
천주교회의 선교사들은 일찍부터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며 장차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는 1942년에 노기남(盧基南) 주교를 서울대목구장에 임명되도록 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는 이미 한국인 성직자들이 수적으로나 능력면에서 충분히 성장하여 있었다. 그 뒤, 일제의 선교사추방정책과 함께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인 성직자들에 의하여 성장해나갔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1920년대부터 교파별 연합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타국에서의 선교활동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불리한 요소들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이 연합운동은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발족을 계기로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이미 반선교사운동(反宣敎師運動)이 한국교회 안에서 일고 있었다. 즉, 일부 한국인 목사들 사이에서 민족교회의 주창과 함께 선교사들의 교권행사(敎權行事)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즉시 선교사추방운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외국선교사의 추방이 이루어진 것은 천주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제 말기의 탄압에 의해서였다. 그 결과 1942년 6월까지는 모든 선교사들의 활동이 중지되었다.
한국교회의 복음전파 활동이 한국인 성직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 뒤 외국선교사들의 활동이 완전히 퇴조한 것만은 아니었다. 8 · 15광복 후 그들의 활동은 일부지역에서 재연되었다.
그 중 일부 선교사들은 공산정권에 의하여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현재 한국천주교회에서는 한국인 사제들이 모든 교구 선교를 담당하고 있으며, 파리외방전교회를 비롯한 메리놀회 · 골룸바노회 · 과달루페회 등 외국 선교회가 일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또한 개신교에서는 장로교 · 감리교 등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이 각지에서 선교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에서는 1975년 서울에 한국외방선교회(韓國外邦宣敎會)를 창설, 해외선교활동에도 종사하고 있다.
방송선교란 라디오 및 텔레비전과 같은 방송매체를 이용하여 선교적 목적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종교가 그 교리와 신념을 전파하려는 시도를 해오는데, 방송을 통한 선교의 경우는 주로 기독교 복음선교의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방송선교 역사도 기독교의 선교역사로 이해되고 있다. 방송을 통한 선교는 방송이 시작된 시기와 거의 출발을 같이한다.
미국의 경우 1906년 세계 최초의 시험방송이 페센덴(Fessenden)에 의하여 시도되었을 때,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 프로그램으로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 「오 거룩한 밤」을 방송하였다. 이는 세계 최초의 시험방송이었고, 또한 종교적 내용이 처음으로 전파를 타고 방송된 첫번째의 사건이었다.
그 뒤, 1920년 세계 최초의 공인된 방송국이 미국 피츠버그에서 호출부호 KDKA로 개국되어 처음으로 교회의 예배실황을 중계하였다. 그로부터 미국의 방송발전은 방송선교의 발전을 가져오게 하는데, 예를 들면 1923년 3월 4일에 뉴욕에 있는 갈보리침례교회가 독자적인 방송국 WQAQ를 설립한 것을 필두로 수많은 선교목적의 방송국이 설립되었다.
우리나라의 방송선교 역사는 기독교복음이 전파된 지 60여 년이 지난 194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선교사들이 주로 선교사업을 펼쳐왔던 연고로 방송을 통한 선교의 구상도 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한국 최초의 방송은 일제 하에서 1927년 2월 16일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이 호출부호 JODK로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이는 일본의 침략정책과 식민지통치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광복과 함께 미국적인 자유사상이 방송국에도 흘러들어오면서 방송의 선교적 활용이 시도되었다. 특히 1948년 12월 17일 선교를 전담하는 방송국인 기독교방송국을 설립해보려는 사명을 띠고 내한한 미국인 선교사 오토 디캠프(Otto DeCamp, 한국명 감의도) 목사의 노력으로 한국기독교연합회 산하에 음영위원회(音影委員會)가 창설되었다.
이 음영위원회는 한국 내의 기독교 각 교단대표와 주한 각 교단 선교부 대표로 구성되었다. 그 아래에 시각매체를 통한 선교사업을 협의하는 시청각분과위원회와 전파매체로 방송선교사업을 담당할 라디오분과위원회의 두 조직을 두었다.
이 협의체를 배경으로 감의도의 노력이 결실을 보아 1949년 6월 15일 한국정부로부터 방송국설립허가를 받았다. 기독교방송의 설립은 6 · 25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지만, 휴전 후인 1954년 12월 15일에 한국 최초의 방송선교기관인 기독교방송이 호출부호 HLKY로 첫 전파를 발사하게 되면서 방송선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한편, 미국의 시카고 근교에 본부를 두고 있는 팀(The Evangelical Alliance Mission, TEAM) 선교회는 선교사의 파송이 불가능한 공산지역에 기독교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한국에 선교방송을 세울 것을 추진하여, 1954년 7월 27일 한국정부로부터 한국복음주의방송국 설립허가를 받았다.
1956년 12월 23일에 호출부호 HLKX로 기독교방송에 이어서 두번째 방송선교기관을 세웠다. 1968년에 방송국 명칭을 극동방송국으로 개칭한 이 방송은 한국어 외에 영어 · 중국어 · 소련어 · 몽고어 등으로 방송 프로그램을 송출하였다.
특히 공산권에 기독교복음을 전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극동방송과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극동방송회사(Far East Broadcasting Company, FEBC)는 1970년 9월에 한국정부로부터 아시아방송 설립허가를 받았고, 1973년 6월 30일부터 호출부호 HLDA로 또 다른 선교방송을 시작하였다.
극동방송과 아시아방송은 설립목적의 유사성과 방송국운영의 원활을 기하기 위하여 1977년 1월 1일부터 공동운영체제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상에 기술된 방송국은 자체방송시설을 갖춘 독자적인 방송선교기관이지만, 독자적 제작시설은 갖추어도 자체의 송출시설을 가지지 못하여 다른 시설을 이용하는 방송선교기관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1959년에 설립된 루터교회 방송선교기관인 루터란 아워(Lutheran Hour)와 1963년에 설립된 한국침례교회 방송부를 들 수 있다.
그 밖에 각 교회의 독자적인 활동으로는 순복음교회의 방송선교부가 있다. 이들 기관은 자체 제작한 프로그램을 일반 방송국의 방송시간을 활용하여 프로그램을 송출하기도 하고, 방송국의 기존프로그램의 제작지원을 통하여 선교목적을 수행하기도 한다.
방송선교 프로그램의 형식도 다양하여 직접 예배실황을 중계하는 경우, 선교적 내용을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표현하는 경우, 성경이나 교리를 해설하거나 신학을 풀이하는 교육적 내용의 경우, 종교음악을 해설과 함께 다루거나 찬송가나 복음성가를 방송하는 경우 등 다양한 방송형식을 택하고 있다. 그러므로 방송선교는 기독교 복음선교의 가장 중요한 수단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