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2월 16일 호출부호 JODK, 출력 1㎾, 주파수 690kHz로 일본인에 의해 서울 정동에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졌다.
일본은 한반도 통치의 수단으로서 방송국 설치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1924년 11월 조선총독부 체신국에 무선실험실을 설치하고 첫 송신, 시험방송전파를 발사한 이후 2년 3개월 여에 걸친 정기시험방송 단계를 거쳐 1926년 11월 30일 ‘반도민중의 문화를 계발하여 복리를 증진시킨다.’는 구실 아래 사단법인으로 설립, 방송무선전화시설을 인가하였다.
당시의 기구로는 이사회와 가입부(加入部) · 기술부 · 방송부 · 총무부가 있었으며, 청취료가 유일한 재원이었다. 단일 채널로 우리 말과 일본어를 혼합한 단일방송을 체신국 검열과의 사전검열을 거쳐 방송하였다.
처음에는 우리 말과 일본어 방송시간 비율이 1:3으로 되었다가, 그 해 7월에 2:3의 비율로 바꾸어 교대로 방송하였다. 방송은 주로 일본어 방송인 경제시황 보도와 우리 말 방송의 물가시세 · 일기예보 · 공지사항 등이었다.
그러다가 일본 동경방송국과 중계방송망을 구축하여, 1929년 9월부터는 일본방송을 그대로 중계하기 시작함으로써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편성하지 않고, 다만 우리 나라의 국악과 기상통보 및 물가시세만 추가 편성하였다.
그러나 6년 여에 걸쳐 실시된 단일방송은 청취자들의 불만을 초래, 수신기보급의 부진과 경영난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중방송, 즉 우리말 방송의 독립 계획을 추진시켜 나갔다.
동시에 전국적인 방송망을 구축하기 위하여 1932년 4월 7일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로 명칭을 바꾸고, 방송부 밑에 일본어 제1방송과와 조선어 제2방송과를 두고 10㎾의 연희송신소(延禧送信所)를 준공하여, 우리 말과 일본어 방송을 분리한 이중방송을 실시하였다.
이어 1935년 7월에는 경성방송국을 경성중앙방송국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1·2차 방송망확충계획을 수립, 9월의 부산방송국 개국에 이어 평양 · 청진 · 이리(지금의 익산) · 함흥 · 대구 · 광주 · 대전 · 원산 · 해주 · 신의주 · 목포 · 마산 · 춘천 · 성진 · 강릉 · 청주에 지방방송국을 1935년부터 1945년까지 10년 여에 걸쳐 개국시켰다.
방송내용면에서는 제1방송은 주로 동경방송의 중계가 위주였으며, 제2방송은 국악과 방송극을 중심으로 한 연예오락과 우리 말 강좌를 비롯한 교양교육, 스포츠중계를 비롯한 각종 보도내용 등으로 다양하게 편성되었으나, 우리 말 방송의 모든 내용은 조선총독부의 엄격한 통제하에 그들의 정신 및 문화적 침투목적에 부합되도록 강요되었다.
특히, 1939년의 중일전쟁, 1941년의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는 방송의 전쟁수단화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방송은 단지 전쟁수단을 위한 도구로 철저히 통제당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 9월 15일 미군에 의해 접수되어, 미군정청 공보부의 방송국으로 바뀌었다. 이후 경성중앙방송국은 서울중앙방송국으로 개칭되었으며, 공영방송 KBS의 모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