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후 최초로 나온 일반통신으로서, 1945년 8월 17일 일제하의 일본 도메이통신(同盟通信) 경성지사에 근무하던 김진기(金鎭琪)를 중심으로 20여 명의 한국인 사원들이 도메이통신 사옥(소공동 테일러빌딩)과 통신기기 및 집기 일체를 인수받아 하루 2편(便)씩 우리말로 발행한 통신이다.
외국통신사와 외신수신계약을 체결하지 못한 채 단파수신기로 외신들을 무단으로 수신하여 신문사에 제공하는 형태였는데, 대표에 김진기, 총무에 홍종생(洪鍾笙)·백병흠(白秉欽), 외신은 송영훈(宋永勳)이 담당하였다. 자금은 홍종생이 출자한 3만원으로 충당하였다.
같은 해 8월 말경 국내정치의 혼란과 좌우익의 심한 갈등 속에서 김진기·백병흠·송영훈 등은 좌익노선을, 홍종생은 중립노선을 주장하여 서로 대립하다가 김진기 등 좌익계열은 학병동맹(學兵同盟) 그룹의 지원으로 단파수신기 한대를 떼어 장소를 옮겨 해방통신 이름으로 계속 통신을 발행하고, 잔류파인 중립계는 통신제호를 국제통신으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