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프랑스인 신부들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神學校)이다.
신부 메스트르(Maistre) 등이 우리나라에 천주교를 전파하는 한편, 방인사제 양성을 목적으로 교황청에서 신학교 설립 승인을 받아,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있는 장낙소(張樂紹)의 집을 빌려 시작하였다.
초대 교장은 신부 프르티에(Pourthi)였으며 신부 프티니콜라(Petinicolas)가 중심이 되어 가르쳤고, 그 밖의 여러 명이 교과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공은 신학과와 라틴어과로 나누어지고 교과목은 철학과 신학을 중심으로 하여 서양의 학문과 문물을 가르쳤다. 또한 동물·식물·지리학·의술 및 과학지식과 일반상식까지도 가르쳤는데, 특히 라틴어가 중시되었다.
수업은 여름철에 주로 이루어졌고, 그 밖의 기간에는 전교활동을 겸하였다. 학생수는 10명 내외로, 좁은 장소와 천주교를 박해하는 시국관계로 많은 학생을 수용할 수 없었다.
한편 신부 다블뤼(Daveluy)를 보좌주교로 선정하여 예비자 교육용 서적을 출판하였으며, 일반 신도 교육의 요람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학당은 단순히 신학생 교육장만이 아니라, 간접적으로는 민중 교화에까지 공헌하였으며,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초·중·고등 교육을 함께 실시한 근대 학교인 셈이다.
그러나 1866년(고종 3) 천주교 대박해 때 교장 등 많은 교직자들이 순교하게 되자 신학생들도 모두 흩어지고 학교는 창설 11년만에 폐쇄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885년에 강원도 원주시 부흥골에 임시 신학교를 설립, 계승하다가 1887년에 서울 용산으로 옮겨 예수성심신학원으로 개칭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로 발전하였다. 이 학당이 자리잡았던 구학리의 배론[舟論]은 현재 천주교에 의하여 성역화되어 보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