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France)

프랑스의 국기
프랑스의 국기
외교
지명/국가
유럽 서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공화제 국가.
정의
유럽 서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공화제 국가.
개관

정식명칭은 프랑스공화국(La République de France)이며, 수도는 파리(Paris, 행정구역상 파리시의 인구는 약 220만 명이나, 위성도시를 포함하면 1,100만 명)이다. 면적은 64만 3801㎢로 한반도의 2.5배이고 유럽연합(EU)의 5분의 1의 넓이이다. 인구는 1989년 5578만 4000명이었던 것이 2015년 현재 6655만 3766명이다.

인종은 북부·중부 유럽에서 이주해 온 켈트(Gaule족)·게르만·노르만계가 대다수이고 소수의 라틴계가 혼재하며, 피레네산맥 북부의 바스크족 50여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공용어는 프랑스어이다. 종교는 가톨릭교(81.4%)·이슬람교(6.89%)·신교(1.64%)·유태교(1.29%)·불교(0.68%)·그리스정교(0.34%) 등이다.

역사

(1) 프랑크왕국의 건설

서기전 2000년경 북프랑스에 켈트족이 이동해 와 서기전 5∼3세기 사이에는 프랑스·영국·스페인 등을 정복하였다. 부족국가간의 대립으로 서기전 2세기경부터 로마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으로 5세기경 서로마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게르만민족 중의 프랑크인이 세력을 확대, 메로빙거왕조의 클로비스 1세(Clovis I, 481∼511 재임)가 프랑크왕이 되어 가톨릭교로 개종하고 프랑크인 교화에 착수하였다.

그가 죽은 뒤 8세기경에는 카롤링거의 샤를마뉴(Charlemagne)가 뒤에 대제(大帝)가 되었다(768∼814 재임). 그는 프랑스·독일·이탈리아에 걸치는 왕국을 건설, 그리스도교를 보급하였다.

800년 로마교황으로부터 서로마황제로 대관되었으나, 샤를마뉴 대제의 사후 분열되어 843년 베르덩조약으로 동프랑크(독일)·서프랑크(프랑스)·이탈리아로 3분되어 현재와 같은 프랑스의 판도가 정립되었다.

(2) 카페(Capet,H., 987∼996)왕조로부터 대혁명기(1789∼1792)까지

서프랑크에 노르만족이 침입하여 이에 대전한 로베르가의 후손인 카페가 카페왕조를 건설함으로써 프랑스왕국의 역사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 왕조시대는 봉건제가 성립, 변용하는 시대로서 전체 중세사(中世史)를 통하여 영국과 끊임없이 대립·항쟁을 계속하였으며, 가톨릭교와 왕권을 강화하였으나 1328년에 단절되고 발루아(Valois)왕조가 수립되었다.

이 왕조의 수립과 동시에 영국이 프랑스왕위를 노림으로써 백년전쟁을 겪게 되었으며, 또한 봉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여 군비·관료제·재정의 정비 등을 이룩하여 국내의 귀족을 억압함으로써 절대왕정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발루아왕조는 16세기 말 신·구교도의 대립·격화·내란으로 결국 앙리 3세(Henri Ⅲ)를 최후로 단절되고 앙리 4세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부르봉(Bourbon, 1589∼1792)왕조가 시작되었다.

앙리 4세시대에는 종교적 내란이 종식되고 국력을 회복, 해외진출이 현저하였다. 그 뒤를 이어 루이 13세(Louis ⅩⅢ, 1610∼1643 재임)시대에는 귀족과 신교도를 억압, 30년전쟁에 개입, 루이 14세시대에 30년전쟁을 프랑스에 유리하게 끝맺었다.

루이 15세·루이 16세(1774∼1792 재임)시대에는 빈번한 해외원정, 궁중의 사치생활 등으로 재정의 악화를 가져와 대혁명을 유발하였다. 18세기의 앙시앙 레짐(ancien régime, 舊體制)에 대해서 신흥시민계급이 도전한 것이 프랑스대혁명인 것이다.

(3) 제1공화정으로부터 제3공화국까지(1792∼1940)

프랑스혁명은 시민혁명이라는 데 정치적 의의가 있다. 절대왕정을 타파하여 봉건제를 일소하고, 입헌의회제와 공화제(제1공화정, 1792∼1802)를 수립하고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였으며, 대혁명의 이념인 자유·평등·박애는 인간 및 민족의 국제적인 해방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프랑스가 유럽에서의 우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혁명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나폴레옹(Napoléon,B.)은 군사적 독재를 감행하면서도 혁명의 성과를 보장, 국민의 신망을 얻어 나폴레옹 1세(1804∼1805 재임)로 제위(帝位)에 오르게 되고 제1공화정은 와해되었다.

그는 혁명전쟁을 계승하여 혁명의 이념과 성과를 유럽대륙에 전파하였으나, 프랑스의 침략성의 노정으로 이른바 나폴레옹전쟁을 야기하게 하여 1815년 완전히 몰락하였다.

그 뒤 부르봉왕조에 의한 왕정복고(王政復古, 1814∼1830)가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국제적으로 보수파인 빈체제(Wien體制)의 일환으로서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였으나 반동적인 성격으로 또다시 혁명을 유발하여 1830년 7월혁명으로 붕괴되었다. 이어 오를레앙가에 의해 7월왕정이 성립되었으나, 1848년 2월혁명으로 무너지고 제2공화정(1848∼1852)이 수립되었다.

2월혁명은 혁명세력이 시민적 공화파와 사회주의적 공화파로 분열되어 전자가 승리하였으나, 이러한 대립을 이용, 보수파가 그 세력을 만회하게 되었으며, 또한 이와 같은 정세를 이용하여서 루이 나폴레옹(Louis Napoléon,B., 1808∼1873)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1851년 쿠데타로 그 지위를 굳히더니, 1852년 나폴레옹 3세로 제위에 올랐다. 이로써 제2제정(1852∼1870)이 시작되었다. 1860년대에는 산업혁명의 진전, 크림전쟁에의 참가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함으로써 명성을 얻고, 자유주의적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멕시코원정·보불전쟁에서의 패배로 제2제정은 붕괴되었다.

1870년 제3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19세기 말까지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하고 아시아·아프리카에 식민지를 확대하였다. 1907년 프랑스·영국·러시아의 3국협상체제를 완성하여 독일과 대립하였고, 1914년 제1차세계대전에 참가, 승리하였다. 베르사유조약에 의하여 독일의 약체화와 안전보장체제를 확립하고자 국제연맹에서 프랑스가 중심이 되었다.

독일이 베르사유체제의 타파와 대외침략정책을 계획하자 영국과 같이 유화정책을 채택하였으나 실패, 제2차세계대전을 맞게 되었다.

1940년 6월 13일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자, 프랑스정부는 처음에는 투르, 뒤에는 보르도로 수도를 옮겼다. 여기에서 페탱(Pétain,H.P.)이 수상에 지명되고, 22일 휴전협정에 서명, 수도를 비시로 옮겨 독일군이 직접 지배하는 지역 이외의 지역을 통치하는 괴뢰정부화하였다.

이에 앞서 제3공화국 정부가 취한 최후의 행동은 6월 9일 비시에서 열린 양원 합동회의에서 압도적 다수로 비시정부를 지지함으로써 제3공화국은 그 종말을 보게 되었다.

한편, 1940년 6월부터 런던에서 자유프랑스위원회를 조직하여 대독항쟁을 계속 주장한 드골(de Gaulle,C.)은 1944년 8월 25일 파리가 연합군에 의하여 수복된 뒤부터 14개월 동안 임시정부(1944∼1946) 대통령으로 통치, 1945년 11월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1946년 4월 헌법 의결을 거쳐 9월 새 헌법을 의결하였으며, 10월 국민투표의 승인을 얻어 제4공화국이 성립하였다.

(4) 현대프랑스(제4·5공화국)

제4공화국(1946∼1958)은 의원내각제의 모순, 군소정당의 난립, 만성적 인플레이션, 식민지에서의 독립운동(베트남·모로코·알제리)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

더욱이 알제리문제를 둘러싼 혼란 속에서 난국해결을 위한 인물로 드골장군이 지목되어 1958년 6월 1일 의회는 그를 수상으로, 또한 국민투표에 의한 승인을 거쳐 대통령으로 당선시킴으로써 제5공화국(1958∼현재)이 성립되었다.

1958년 10월 15일 수립된 제5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드골은 1965년 12월 재선되었으나, 1969년 4월 국민투표(상원개편·지역창설)에서 패배하자 퇴진하였다.

뒤를 이은 퐁피두(Pompidou,G., 1969∼1974 재임)가 1974년 4월 병사하자 지스카르 데스탱(Giscard d'Estaing,V., 1974∼1981 재임)이 정권을 인수받았으며, 1980년 5월 선거에서 야당인 사회당의 후보 미테랑(Mitterrand,F., 1981∼1995)이 당선됨으로써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제5공화국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확대하였으며, 군소 정당의 분립으로 인한 정국불안을 막기 위하여 의회의 권한을 대폭 제한하였다.

대통령은 1962년 11월 6일 개정된 헌법에 따라 직접보통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7년이다. 대통령은 수상 및 내각의 임면권과 의회해산권을 가진다. 수상과 각료는 국회의원을 겸직할 수 없으며, 하원(국민의회)이 정부에 대하여 불신임을 결의하면 내각은 총사퇴하여야 한다.

의회는 국민의회(577석, 임기 5년)와 상원(321석, 임기 9년)으로 구성되며, 국민의회의원의 임기는 5년이고, 소선거구제로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한다. 단 1회에 과반수를 획득한 후보자가 없을 경우 2차투표에서 최고득점자가 당선된다. 상원은 지방공공단체대표로 임기는 9년이며, 3년마다 3분의 1씩 개선하되,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선출된다.

1995년 5월 7일 프랑스 대통령선거 제2차 결선투표에서 공화국연합(RPR)의 시라크 후보가 죠스팽 사회당후보를 누르고 프랑스 제5공화국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시라크의 당선으로 14년간 계속된 미테랑 대통령의 사회당 정권이 막을 내리고 보수주의 우파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5월 18일 쥐페(Juppé,A.)를 신임 수상으로 하는 쥐페 내각(각료급 장관 26명, 담당장관 및 국무상급 16명)이 출범, 쥐페 내각은 범우파 화합내각으로서 제1당인 공화국연합(RPR)과 프랑스민주연합(UDF), 공화당(PR) 등 우파의 각 계파의 안배가 고르게 이뤄졌다.

시라크 정권은 실업과 재정적자 등 프랑스 경제·사회의 당면문제 해결을 우선과제로 추진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유럽통합에서 주도적 역할수행 등 프랑스의 독자적인 영역유지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높은 실업률과 쥐페 내각의 유럽단일통화체제(EMU) 추진을 위한 긴축재정 정책에 국민의 불만이 높아졌다.

1996년 6월 총선에서 사회당의 죠스팽이 수상으로 피선, 우파의 시라크 대통령과 좌파의 죠스팽 수상이 이끄는 코아비타시옹(Cohabitation:동거) 정부가 탄생, 1986년과 1993년(미테랑 대통령 집권시절)에 이어 세 번째 좌·우파 동거정부가 탄생하였다.

6월 4일 죠스팽 수상은 각료 26명 중 사회당 18명, 급진 사회당 3명, 시민운동당 1명, 환경당 1명, 공산당 3명 등 좌파의 거의 모든 정당을 망라하여 26명의 작은 정부를 추구하였는데, 여성각료가 8명을 차지하였다.

동거정부하의 죠스팽은 실업난의 해소, 주요 국영기업의 민영화 중단, EMU 정시출범을 위한 긴축정책 추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죠스팽 내각의 당면과제는 실업해결인데, 이와 관련 1997년 12월17일 법정 주간근로시간(35시간)을 단축하는 정부측 안을 확정함에 따라 우파의 비판이 확대되어 동거정부 내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1998년 1월 27일 법정근로시간을 35시간으로 감축하는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 3월 31일 2차표결을 거쳐 최종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임금수준을 감축하지 않으면서 2002년부터 법정근로시간을 35시간으로 단축하고, 그 이전에 자발적으로 근로시간을 단축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정부보조금을 지급하는 등의 주요 원칙을 설정하였다.

외교에 있어서 프랑스는 미·소 등 초강대국에 맞서는 국제적 지위향상을 위한 독자적 외교정책이 드골 대통령 이래 계속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탈퇴, 핵확산금지조약 비준서명, 유럽공동체(EC) 경제권 강화, 대러시아 외교 등에서 미국과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는 어느 강대국보다도 아프리카에 대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드골 대통령 이래 대소(1992년 대러시아로 변경) 자주성 견지, 유럽통합의 주도적 역할 수행, 제3세계 개발 지원 등을 통하여 미·러에 대응하는 세력권 형성을 추구하며, 국제사회에서 미·영 등 영어사용국의 문화적 주도권을 견제하고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방안으로 의욕적인 범세계적 프랑스어 보급 확대정책과 프랑스어권의 결속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지역적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중시 경향, 특히 아프리카 프랑스어권과는 막대한 경제원조 제공, 안보협력, 연례 프랑스어권 정상회담 등을 통해 구 식민종주국으로서의 지도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국제경제기구 및 서방 경제정상회담에서 아프리카 제국의 입장을 옹호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번영하는 경제권인 태평양지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고, 1993년 3월 수립된 우파 행정부도 유럽통합 추진에 있어서 미테랑 전 대통령과 기본적으로 입장을 같이하고 있으나 유럽통합 추진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1995년 시라크 대통령 당선으로 유럽통합의 기본방침에는 변화가 없으나 통합 주축국으로서의 경제력 강화 및 외교적 영향력 신장에 중점을 두고 있다.

좌·우 동거 정부하에서의 세력 견제와 갈등으로 외교문제에 있어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시라크 대통령의 외교정책 방향은 다음과 같다. ① 헌법상 외교·국방 분야에서 독점적 권한을 가지고 있어 취임초부터 유럽선진국(G-7) 정상회담, 유럽연합(EU) 정상회담 등에서 적극적인 역할 추구.

② 보스니아사태 해결 노력 등에서도 미국의 결정적 영향력은 인정하나 독자적 시각에 입각한 활동영역 확보 노력(신속대응군 창설 등).

③ 탈냉전 이후 국제정치는 다극화 추세에 있으며, 다극화가 미국 중심의 유일체제보다 더 안정적이라는 국제정세관을 가지고 정책화 노력, 특히 미국과 7개 강대국(러시아·중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인도)간 역동적인 힘의 균형 추구를 지향.

④ 프랑스의 영광 및 지위 유지를 위해 미국이나 독일 등 강대국 노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독자적인 영역을 견지하려는 입장.

⑤ 독일과 긴밀한 공조관계를 유지하면서 유럽 통합의 견인차로서 프랑스 위상을 강화하고자 하며, 유럽통합의 사회적 측면 강조.

⑥ 제3세계 지원 및 아·태지역 협력 등에 매우 적극적이며, 중국·일본 등 아시아 주요 국가들과의 전략적 동반관계 수립 및 경제협력 활성화를 추구한다.

유럽단일통화(EURO) 도입을 위해 시라크 대통령은 필요한 긴축 경제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저 1998년 5월 조기 총선을 실시하였으나, 긴축재정 실시에 따른 높은 실업률 발생 등으로 인해 당초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사회당이 집권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죠스팽 수상은 경제 조화 기준의 신축적 해석,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라틴계 국가의 EMU 참여를 통한 게르만계 국가의 독주 방지, EMU 참여국 정부의 통화신용정책 개입, EURO화의 달러화·엔화 대비 과도평가 반대입장을 취하면서 물가안정 이외에 고용증진정책도 중요하다는 견해를 내세웠다.

아울러 GDP 3% 기준의 완화를 위한 재협상을 추진하고 이탈리아 및 스페인이 EMU 출범 회원국으로 가입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관련하여 프랑스는 1966년 3월 미국 주도의 NATO연합사령부 등 군사기구에서 탈퇴한 후 연간 NATO예산의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는 한편, 여타 회원국과의 병참 지원, 합동군사훈련 및 정보교류에 관한 쌍무협력 협정을 체결하였다.

1995년 5월 시라크 대통령 우파 정부 출범과 더불어 군사위원회 복귀 및 국방장관회의 참가 발표(1995.12.), NATO핵전력협의체 복귀 결정(1996.1.) 등 대NATO 군사협력 거부자세에서 탈피, 협력 강화정책으로 선회하였다.

1996년 6월 3∼4일 베를린 외무장관회의에서 프랑스가 주장해 오던 ‘유럽독자안보방위체’ 개념이 실현되었으며, 프랑스는 유럽안보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미국의존도를 줄이고, 통일독일을 동맹체 속에 묶어 놓는다는 NATO정책을 수립, NATO 제반 기구 내에서의 프랑스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프랑스와 NATO 내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미국과의 알력확산이 예상된다.

프랑스의 대미관계와 관련하여 아프리카·중동 지역에서의 주도권 다툼이 예상된다. 시라크 대통령은 취임 후 최초 방문지로 아프리카를 선정, 4개 국가(모로코·세네갈·코트디브와르·가봉)을 순방하였다. 최근에는 동부 자이레 문제 등에 관심을 표명하며,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와의 역사적 유대관계를 기반으로 협력강화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유럽연합 등에서 제3세계권의 대변자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프랑스는 1998년 재발조짐을 보이는 걸프사태에서 미국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자제하고 정세를 관망하며 이라크와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하고 있다.

보스니아 문제와 관련해서도 보스니아 분쟁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이 인도주의적 고려에 집중되어 세르비아계 공격에 미온적으로 대응하였다고 판단, 프랑스는 군사력을 수반한 강경 대응을 추구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는 평화적 협상을 통한 포괄적 해결방안을 지지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는 유엔평화유지군 안전보장을 위한 신속대응군(Rapid Reaction Forces) 창설을 주도하였다. 그 결과 영국·네덜란드와 공동으로 신속대응군을 창설하여 2,000여 명의 중무장 병력을 파견하였다. 프랑스는 또한 최대의 평화유지군 파견 국가이기도 하다(약 4,500명).

대아시아문제와 관련하여 시라크 대통령은 동양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어 재임기간 중 대아시아 관계 심화노력이 예상된다(1996년 방콕 아시아경제정상회담 참석, 1996년 일본 방문, 1997년 중국 방문, 1997년 프랑스어권 정상회담 베트남 개최, 1998년 일본 방문 등).

그러나 남태평양에서의 핵실험 실시로 아·태 국가간의 관계 악화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다. 핵실험 실시와 관련하여 시라크 대통령은 1995년 6월 13일 프랑스가 1995년 9월부터 1996년 5월 기간 중에 8회의 핵실험을 남태평양에서 재개할 것이라고 발표(국가안보와 핵억지력의 안정성 및 신뢰성을 유보하기 위해 추가적인 핵실험이 필요하다고 설명)하였으나, 프랑스는 핵비확산체제의 강화를 위하여 1996년 포괄핵실험금지조약(CTBT)에 서명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프랑스는 핵실험 재개 결정 이후 1995년 9월 5일, 10월 2일, 10월 28일, 11월 22일, 12월 27일, 1996년 1월 27일에 6회에 걸쳐 핵실험을 실시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핵실험 횟수를 당초 8회에서 6회로 축소하여 1996년 1월 29일 핵실험을 완전히 종료한다고 발표하였다.

프랑스의 국방정책 목표는 유럽안보 유지 및 자주국방 확립, 세계안보에 기여하며 국가이익 보호, 국제적 무기억제에 적극 대처함에 있다.

그 기본 원칙으로는 독자적인 국방정책 결정 및 우방국과 돈독하고 연대성 있는 관계유지에 있다. 국방의 사명으로는 외부 위협 및 침략으로부터 국토방위 보장, 서유럽 방위에 참여, 해외영토에 주재하는 프랑스 국민의 안전보장, 해운을 위한 해로 안전보장, 그리고 국제법 준수에 따라 국제 평화유지 임무 수행에 있다.

프랑스군과 NATO군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1966년 이후 NATO작전 지휘관에서 탈퇴하였으나 연락단을 상주시키며 NATOR NSDML 작전활동에 계속 참여하고 있다.

NATO 예산부담은 1989년도에 17%(미국 23%, 영국 19%, 독일 16%, 이탈리아 6%, 캐나다 65%, 노르웨이 1.11%, 포루투갈 0.635% 등)이며, FATAC·AAFCE 협약을 준수하고 있다(공군).

프랑스는 NATO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NATO참여는 지휘권 탈퇴로 자동개입이 아닌 프랑스 국가원수의 결심을 얻은 다음 참여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NATO의 일부 국가보다도 더욱 현실적인 참여(예:벨기에·네덜란드 등 국가보다도 35% 이상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프랑스군의 편제를 보면 육·해·공군 및 헌병군의 4개 군으로 구성되며, 작전 기능별로는 전략해군·전술핵군·기동군(기능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1998년 5월 현재 육군 23만 5,834명, 공군 8만 3,448명, 해군 6만 5,195명, 헌병대 9만 5,242명, 기타 공공서비스 분야 6만 8,561명 등 총 54만 8,280명이 된다.

해외 주둔군 및 파견현황을 보면 프랑스의 해외 도(島) 및 영토(DOM-TOM)의 안전보장과 자국 국민의 보호 및 시간적·지역적으로 극히 제한적인 적대행위에 대응하기 위하여 해외 도, 영토에 군사력을 주둔시키고 있다. ST. Pierre & Miquelon(30명), Antilles(4,670명), Polynésie(3,710명), Guyane(3,620명), Réunion(3,690명), Nouvelle Calédonie(3,670명) 및 태평양 등 3개 해역(2,150명)에 주둔하고 있다.

이 밖에도 주로 아프리카 지역에 방위협정 또는 군사원조협정에 의하여 프랑스 국익을 수호하고, 해외 영향력을 보장하며 취약지역(항해·기착·보급기지)의 안전보장 및 증원군 파견을 위한 기본시설 유지를 위해 군사력을 파견, 주둔시키고 있다.

또한 평화유지군과 관련하여 프랑스는 유엔 및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국제법을 준수하고 평화유지 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국제사회의 결정과 분쟁 당사국 및 관련 국가의 요청에 따라 인도적 구호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1998년 현재 구 유고(6,470명), 그루지아(10명), 터어키(160명), 레바논(440명), 근동지역(16명), 시나이(16명), 쿠웨이트(15명), 사우디아라비아(140명), 소말리아(100명) 등에 파견하고 있다.

1974년 이래 프랑스군은 8회(레바논·자이레·모리타니아·챠드·중앙아프리카·누벨 헤브리드·우간다·이라크)의 해외작전에 참가하였다. 1998년 현재 아프리카 7개국 및 해외 도·영토 주둔의 기간부대가 주둔중이고, 레바논에 국제평화군 및 다국적 평화군으로 주둔중이며, 구 유고·터어키·소말리아 등에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주둔하고 있다.

좌파정부의 경제정책 기본방향은 전통적 사회철학 기반 위에서 케인스 경제학의 재정정책을 전개하는 것인데, 노동 계층의 권익향상과 전국민의 사회복지 수준 제고를 추구하면서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정책과 가계 구매력 향상을 위한 조치를 통한 실업 및 성장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또한 자유시장 경제원리(기업가 중심)보다는 정부 주도의 방법론을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실업 해소 및 경제성장에 최우선 순위를 부여하되, 그 방법은 정부가 직접 나서서 고용창출에 노력한다는 것이다. 좌파정부의 출범으로 프랑스 텔레콤(France Telecom)·톰슨씨에스에프(Thomson CSF) 등 일부 주요 국영기업체의 민영화가 중단되었다.

프랑스경제는 1994년 2.8%, 1995년 2.2%에 이어 1996년 1.3% 성장에 머물러 성장세가 계속 둔화되었으며, 1997년에는 약 2.3%의 성장을 기록, 임금 및 물가 상승은 계속적으로 안정적인 추세에 있다.

주요 산업은 철강·자동차·화학·농업 등이다. 미테랑 정부는 1982년 대대적인 국유화 법안을 발효시켜 전기통신공사, 유리·강철 공사, 알루미늄, 화학제품, 전자회사 등 5개 주요 기업그룹과 39개 은행 등 41개 금융회사를 국유화하였다.

프랑스는 서유럽 제1의 농업국으로 주요 농산물은 밀·보리·옥수수 등이며, 포도주 생산은 세계 제1위이다. 이 밖에도 항공산업·방위산업 등 첨단과학산업에서 주목받고 있다.

프랑스 산업에서 분야별 주요 부분으로서 농업 부문은 괄목할 만하다. 프랑스는 유럽 제1의 농업국으로 국토의 55.9%에 해당하는 3070만㏊가 농업 경작지이다. 농업 분야 종사자는 119만 명으로 전체 취업인구의 5.4%(1993년 3월 기준)를 점유하고 있으며, 농업생산은 1993년 기준 국내총생산의 2.5%, 농산물 수출은 총수출량의 6.65%(농식품 가공류 포함시 16.7%)를 점유하고 있다.

1993년 농산물 및 농가공 제품의 교역규모는 수출 1978억 프랑, 수입 1384억 프랑 규모로 563억 프랑의 흑자를 기록하였다. 프랑스는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의 농산물 수출국이다.

한편 제조업의 1992년도 국내총생산 구성비는 21%로서 영국(23%)·이탈리아(23%)와 비슷한 수준이다(독일 31%, 일본 28%, 미국 19%). 1992년 제조업 종사인구는 취업인구의 17%를 점유하고 있으며, 1980년 이래 1988∼1991년 기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감소 추세를 보여왔다.

제조업 부문의 무역수지는 1992년에 36억 프랑의 흑자를 기록한 데 이어(1986년 이래 최초로 흑자로 반전됨) 1993년에는 445억 프랑의 대폭적인 흑자를 기록하였다.

프랑스 제조업의 문제점으로는 ① 교육훈련 부족으로 매년 1만 명 이상의 기술인력이 부족하고, ② 연구개발 투자가 부족하며, 그나마 항공우주산업 등 공공 부분에 치우쳐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미흡하다, ③ 기업의 부채비율이 미국·독일 등 경쟁국에 비하여 높은 편이다, ④ 대기업 중심의 세계화 추진으로 중소기업 육성 부진 등 산업 부문간 불균형이 초래되고 있음 등이 지적된다.

최근의 경쟁력 동향은 사회당 정부의 인플레이션 억제정책과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압력완화에 따른 경쟁력 회복에 힘입어 1979∼1980년간 평균 2.1%의 생산성이 향상되었다(1987∼1992년간 유럽시장에서는 3%의 경쟁력 강화). 그러나 최근 통일독일의 경기 종료 및 영국·이탈리아·스페인 등 경쟁국의 평가절하 등으로 1992년 2/4분기부터 경쟁력 강화 추진은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다.

부문별 경쟁력은 자동차 등 전통산업에 비교우위가 있으나 기계화학은 독일, 전자산업은 일본, 섬유는 이탈리아, 정보산업은 미국에 각각 뒤지고 있으며, 관광산업을 비롯한 3차산업의 비중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국민총생산은 1987년 7,419억 9,400만 달러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2,860달러였으나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2조 8억 달러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445달러이다.

그리고 무역은 1988년의 경우 수출 1,677억 6,500만 달러(자동차·화학제품·농산물·의류)이고, 수입은 1,788억 6,300만 달러(석유·기계류·철강제품)이었으나, 2015년의 수출은 5697억 달러이고, 수입은 6638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프랑스 경제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는 높은 실업률과 재정적자 누적(1996년 말 실업자 수는 308만 명으로 실업율은 12.6%)이다. 1997년 상반기까지 부진을 면치 못하던 프랑스 경제는 하반기 들어 수출이 더욱 호조를 보이고 가계소비가 점차 활기를 띠면서 1998년에는 경기회복세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1997년 289억 달러의 흑자 달성, 수출은 1996년 대비 13.7%, 수입은 8.3% 증가하였는데, 이러한 높은 수출증가율은 1997년 전세계 무역증가율 8%를 크게 상회하는 것으로 세계 전체 수출 중 프랑스는 5.3%를 차지하였다.

1999년도 프랑스 정부의 재정정책의 주요 방향(1998.7.22. 발표)은 고용창출 확대, 사회정의 증진, 환경보호에 중점을 두며, 전체적으로 보면 기업·가계가 부담하는 세금을 경감함으로써 경기 활성화를 강화하면서 재정적자는 국민총생산의 2.3% 이내로 축소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구체적인 정책수단으로 고용창출을 도모하기 위해 기업이 부담하는 고용세(tax professionnlle)를 향후 5년간 점진적으로 폐지한다는 것이다.

고용세는 기업이 근로자에게 지급하는 임금총액을 대상으로 부과하는 세금(현재 세율은 약 1.2% 수준)으로서 1999년에는 55만 프랑 이하의 임금을 지불하는 기업(프랑스 기업의 69%가 해당)에게 세금을 면제해 주고 2000년도에는 160만 프랑의 임금을 지급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세금을 면제해 주는 등의 방식을 적용, 종국적으로 2003년에는 고용세를 완전히 폐지한다는 구상이다.

사회정의 증진(소득의 재분배)을 위해 1억 프랑 이상의 개인재산에 대한 재산세율을 인상한다는 계획이고, 환경보호를 위해 디젤유에 대한 소비세 인상 및 환경산업에 대한 감세 조치를 단행한다는 것이다.

환율의 동향으로서 프랑화는 1996년 하반기 이후 1997년 7월까지 달러화 및 파운드에 대해 절하 추세가 지속되었으나 8월 이후 절상으로 반전하였다. 한편 독일 마르크화에 대해서는 최근 소폭 절상하여 1997년 말 1마르크당 3.35프랑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유럽환율조정장치(ERM) 내에서의 프랑화의 대 마르크화 기준율(1DM=3.35386FFr)수준이다.

통화 통합이 예정대로 진행되는 한 프랑화의 마르크화에 대한 환율은 현수준(1DM=3.35FFr)을 지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달러화 및 파운드화에 대해서는 프랑스의 경기회복이 본격화되는 경우 더욱 강세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프랑스의 화폐단위는 프랑(Franc)이다. 프랑스의 노조연합체로는 노동총연맹(CGT)·민주노동총연합(CFDT)·노동자의 힘(Forces Ouvriéres) 등 3대조직이 있으며, 노동총연맹이 가장 크다.

의무교육은 6세부터 18세까지 실시되고 있다. 일간지 약 100개와 세계 4대통신사의 하나인 AFP가 있다. 라디오방송은 국영인 ORTF 등 14국인데, 미테랑 사회당 정권의 등장 후 자유화되어 사설방송국이 난립하고 있다. ORTF는 텔레비전 3국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와의 관계

(1)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 이전까지의 양국의 접촉관계(1831∼1886)

조불관계의 시작은 평탄하지 못하였다. 양국간 최초의 접촉은 먼저 종교면에서, 그 다음은 이를 계기로 군사적인 충돌로서, 나중에 외교적인 국교수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831년 로마교황청이 조선교구(朝鮮敎區)를 창설하고 조선에서의 포교를 파리외방전교회에 위탁함으로써 조선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파견되기에 이르렀고, 1836년 이래 3년에 걸쳐 앵베르(Imbert,L.M.J.) 신부를 비롯한 3명의 선교사가 조선에 몰래 입국하여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839년 그 동안 포교에 종사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모두 희생되는 사건(기해박해)은 프랑스가 조선에 간섭하게 되는 구실이 되었고, 나아가서 프랑스군함을 조선 해안에 파견시키는 계기가 되어 1846년 프랑스극동함대사령관(톈진 주재) 세실(Cécille)해군대령이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외연도(外煙島)에 나타나 조선 정부에 항의문을 보내고 다시 돌아갔다.

이에 대한 회답요구를 위하여 라피에르(Lapiérre) 대령은 2척의 군함을 이끌고 전라도 고군도(古群島)에 원정하였으나 난파당함으로써 실패하였다.

1866년 조선에서 12명의 프랑스신부 중 9명이 살해되는 박해가 일어나자 프랑스극동함대사령관 로즈(Roze,P.G.) 제독은 박해 속에서 탈출에 성공한 리델(Ridel,F.C.) 신부와 함께 두 차례에 걸친 조선원정을 결행하여 강화도까지 점령하였으나(병인양요, 1866.11.), 이는 결국 조선의 승리로 돌아감으로써 쇄국정책의 장본인인 흥선대원군을 더욱 의기양양하게 하였다.

(2) 수교 후 한말의 조불관계(1886∼1910)

① 조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 관계발전:강화도에서의 조·불전쟁에 패퇴한 프랑스측(Napoléon Ⅲ)은 조선원정 실태의 책임을 물어 드 벨로네(de Bellonnet,B.) 주청공사대리를 소환하고, 뒤에 신미양요(1872)의 피해국인 미국이 프랑스 정부에 제의한 불미대한공동작전(佛美對韓共同作戰)에 대해서도 ‘조선에서의 무력행사에 대한 완전한 회피태도’를 취함으로써 미국의 공동정한제의(共同征韓提議)를 거부하였다.

프랑스는 강화도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대하여 나쁜 감정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필두로 영국·독일(1882)·러시아·이탈리아(1884)가 잇따라 한국과 수교하게 되고, 한반도에서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자, 프랑스는 1886년에 이르러 뒤늦게 교섭을 시작하여 선교문제로 논란 끝에 6월 4일 프랑스측 전권특사 코고르당(Cogordan,F.G.)과 조선측 한성판윤 김만식(金晩植), 고종의 외교고문관 미국인 데니(Denny,O.N.) 사이에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국교가 수립되었다.

조약 체결 1년 후 비준서를 교환한 양국은 천주교문제로 프랑스 선교사와 조선 지방관리, 교인과 민간인 사이의 분쟁이 조·불간의 외교문제로 확대됨은 물론, 이러한 불미스럽고 지루한 교안시대(敎案時代)는 교민조약(敎民條約, 1899)과 선교조약(1904)이 성립되기까지 갈등이 컸으며, 이로 인하여 프랑스군함들의 군사적인 시위가 제물포(지금의 仁川)를 비롯한 한반도 해안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청일전쟁(1894∼1895) 후, 프랑스는 러시아·독일과 함께 3국 간섭의 일원이 되면서부터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과시하게 되어, 경의선 부설권, 광산채굴권, 대한제국 정부에 대한 차관 공여 등 엄청난 경제적 이권을 얻었다.

아관파천 중에는 고종이 주한프랑스 대리공사 플랑시(Plancy,V.C.d.)를 통하여 프랑스 정부에 파병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러시아세력이 물러가자 러시아 군사고문관 로미노프(Rominof)의 후임으로 프랑스의 포병대위 페이외(Peyeur,G.)가 임명되었다.

클레망세(Clémencet,E.)는 대한제국 농상공부 우체사무주임(우체국장, 1888.12.)에 임명되어 한국체신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다주었고, 1900년 7월에는 우표·우편엽서를 프랑스에 의뢰하여 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프랑스우편협정이 체결되었다(1900.4.17.).

1900년 5월에는 법부 고문관으로 크레마지(Crémazy,L., 1905년 8월까지 재임)가 임명되었으며, 철도·광산 등 기술 분야에 라팽(Rapin)·트뤼슈(Truche)·푸샤르(Pouchard) 등 모두 15명의 프랑스인이 한국 정부의 중요 관직에 등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프랑스관계는 일본측이 강요한 외국인 용빙협정(1904.8.22.)에 의하여 일본인으로 대치되게 되었고, 1905년 을사조약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한·프랑스간의 공식적인 외교관계도 끝을 맺게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1907년 불일협상(佛日協商)에 따라 인도차이나 식민지통치의 이권과 관련, 일제의 한국식민지화정책에는 미온적 태도를 보이면서 다른 열강과는 달리 1910년 국권상실 이후에도 주한공사관을 조선영사관으로 격하시키고 계속 공관을 유지하였다.

② 사회·문화 관계:1886년의 조약체결로 조선에서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자 파리외방전교회는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한반도에는 가톨릭문화가 들어왔다.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뮈텔주교(Mgr.Mutel,G.C.M., 閔德孝, 1890∼1933 재임)가 내한하였을 때는 이미 프랑스 선교사에 의하여 서울에 설립된 양로원·고아원·신학교가 있었다.

뮈텔 주교는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를 발견, 프랑스어로 번역, 서양학계에 소개하였으며, 기해박해에 관한 ≪기해일기≫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또한 종현성당(鐘峴聖堂:지금의 명동성당)·약현성당(藥峴聖堂) 등을 준공시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서양식 건물을 건축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한국 최초의 사전인 ≪한불사전≫과 최초의 한국어문법책인≪한국어문법 Grammaire Coréenne≫이 1880년과 1881년에 프랑스 신부들에 의하여 발간되었으며, 1906년 10월 19일 드망즈(Demange,F., 安世華) 신부는 순 한글로 된 주간지인 ≪경향신문 京鄕新聞≫을 창간하여 한국언론 창달에 이바지하였다. 프랑스 신부들에 의한 가톨릭문화는 교육·기술·저술을 통하여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크나큰 영향을 주고 있다.

한국 최초의 프랑스어교육기관이 1895년 10월 고종에 의하여 법어학교(法語學校)로 설립되었는데, 마르텔(Martel,E., 1949년 서울에서 죽음)은 최초의 프랑스어 교사였다. 법부 고문관 크레마지는 ≪대한형법 大韓刑法≫(1905)을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하여 한국 형법을 최초로 서양에 소개하였다.

한말을 통하여 한·프랑스 문화관계에서 불후의 업적을 남긴 사람은 주한프랑스 총영사관에 재직한 쿠랑(Courant,M., 1890∼1892 재임)이다. 그는 3,821권에 달하는 한국문헌을 ≪조선서지≫(1896)로 펴내어 한국의 서지문화를 최초로, 유럽에 소개하였다.

한국인 중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으로서는 15명의 프랑스대학교 유학생과 홍종우(洪鍾宇, 1890∼1893 파리체류)를 들 수 있으며, 이범진(李範晉)의 아들 이위종(李瑋鍾)은 1901년 프랑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였다.

한말 당시 여타의 열강과의 관계가 모두 그러하였듯 수교 후 한·프랑스 외교도 프랑스의 일방적인 대한외교로 이어졌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어려운 재정 속에서도 1900년 4월 24일 파리에 주프랑스대한제국공사관(閔泳翊 공사 부임)을 설치하여 뒤늦게 대유럽외교에 힘을 기울이려고 노력하였다.

프랑스의 외교적인 지도로 헤이그평화회의(1902.2.20. 閔泳翊 공사 참석), 육전병상군인구호협정조인(1903.2.3.)을 비롯하여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참가로 한국의 문물을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하는 문화외교도 벌였다는 것은 한·프랑스 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

(3) 일제강점기의 한·프랑스관계(1911∼1945)

프랑스의 대한정책은 그 정책의 중심이 한국의 독립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선 기존의 극동 세력의 기초인 영일동맹을 깨뜨리고 팽창하여 가는 일본세력을 막아 어떻게든 자국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를 보존해 나가는 데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스는 불·일협상(1907.6.10.)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을사조약 이후 한국인 망명객들이 상해(上海)에 모여들게 되자 상해주재 프랑스총영사관 당국은 한인들의 망명·정치활동을 묵인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4월 13일 당시 1,000여 명의 한국 애국지사들이 상해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 중에서 600여 명이 프랑스조계에 머무르게 되어 우리 독립운동의 해외구심점을 이루었으며, 그 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훙커우공원사건(虹口公園事件)에 이르기까지 2,000여 명의 한국인들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다.

한편, 1919년 베르사유강화회담에는 상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 파견한 김규식(金奎植)이 파리에 도착하여(3.13.) 4월 13일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대표로 위임장을 받고, 구미위원 부위원장을 겸하여 파리에서 대열강외교를 전개하였다.

그 뒤 파리위원부는 통신국(通信局)을 병설하여 1921년까지 <자유대한 La Corée Libre>·<한국의 독립 L’Indépendance de la Corée> 등을 한국어·영어·프랑스어로 발행하여 프랑스 및 유럽여론에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김규식은 5월 10일 강화회의 의장 클레망소(Clémenceau,G.)에게 한국 국민의 독립공고서(獨立控告書)를 제출하였으나, 회의가 끝날 무렵 강화회의 사무총장 두스타(Dusta)와 화이트(White)의 이름으로 한국문제는 세계대전 이전의 문제로서 강화회의에서 취급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앞으로 국제연맹에 문의하기를 바란다는 뜻의 회답을 받았을 뿐이다.

이처럼 김규식의 강화회의에 대한 외교는 아무런 성과도 없었으나, 김규식을 비롯한 파리위원부의 활동은 눈부신 바 있어, 이를 계기로 한국독립문제를 국제문제로 부각시켰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회의 종료 후, 김규식을 비롯한 파리위원부(李灌鎔·金湯·黃己煥·趙素昻·呂運弘 등)는 파리를 비롯한 유럽 주요 도시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강연회를 개최하고, 국제회의에 참가하여 한국독립의 지원을 유럽인들에게 호소하였다.

그 뒤 미국에 있는 이승만(李承晩) 임시정부대통령으로부터 소환을 받고 김규식은 김탕·여운홍을 대동하고 파리를 떠났다. 김규식이 떠난 뒤 파리위원부는 황기환을 위원장서리로 하여 계속 활동하였는데, 1920년 1월 8일 프랑스인권옹호회와의 공동주최로 파리위원부는 대연설회를 개최, 이를 계기로 15일 한국독립후원동지회가 프랑스인 33명과 중국인 등 외국인을 포함하여 모두 40여 명으로 발족하여 파리위원부를 지원하게 되었다.

파리위원부가 1921년 말까지 약 2년간 파리에 존속하면서 짧은 기간이지만 프랑스인과 유럽인들에게 한국문제를 인식시키려고 홍보책자를 간행하면서 노력한 사실은 우리 해외독립운동사의 큰 업적으로 평가된다.

프랑스에서의 우리의 독립운동은 제2차세계대전중인 1940년 6월부터 1944년 8월 25일까지 파리를 비롯한 국토의 대부분을 나치독일군에게 점령당한 프랑스인들에게 크게 감명을 주었다.

1945년 2월 28일 충칭(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독선전포고(對獨宣戰布告)를 선언한 다음, 충칭주재 프랑스대사는 3월 8일자로 프랑스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함을 밝혔다는 것이다(이러한 사실은 우리 임시정부의 외교문서에 밝혀져 있으나 미국외교문서에는 이를 부인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프랑스외교문서가 공개될 때까지는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충칭의 임시정부는 주법임정대표(駐法臨政代表)로 파리의 교포인 서영해(徐領海)를 임명함으로써 프랑스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명백히 하고 있다. 서영해는 파리의 숙소에 ‘Agence Korea’라는 간판을 내걸고 저술활동도 하였는데, 1929년에 역사소설을 프랑스어로 발행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프랑스로 유학한 최초의 한국인은 10세 때에 가족과 함께 망명하여 1919년 툴루즈대학(Université de Toulouse)에 입학한 민원식(閔元植)이다.

1920년에 정석해(鄭錫海, 전 연세대학교 교수)·김법린(金法麟, 전 문교부장관) 등을 비롯하여 1920∼1940년 사이에 약 20여 명이 프랑스에 유학하였으며, 윤을수(尹乙洙) 신부는 1939년 ≪한국에서의 유교≫라는 제목으로 한국인 최초로 소르본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4) 광복 후 한·프랑스관계

① 한·프랑스 국교재개와 유엔 프랑스군의 6·25 참전 :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을 때, 프랑스는 1944년 8월 25일 나치독일군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여 우리보다 1년 전부터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프랑스는 드골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새로운 제4공화국의 출범준비로 정국이 혼란한 상황하에 있었으며, 우리도 미·소 양국의 군대 진주 및 좌우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양국의 이러한 상황하에서 정상적인 국교는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파리에는 10여명의 우리 교포가, 서울에는 한말부터 프랑스어 교사로 지내던 마르텔가(Emile Martel家)와 역시 한말 프랑스상회를 경영하던 플레상가(Plaissant家)의 두 가족을 비롯해서 프랑스 수녀·신부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한·프랑스 양국이 공식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8월 15일 우리 정부가 수립된 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얻기 위한 우리의 대표단(張勉 단장·張基永·金活蘭·趙炳玉 등)을 파견하여 승인외교를 전개하던 중 프랑스대표단과 프랑스 언론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에서 비롯된다.

9월 1일에서 12월 21일까지 개최된 이 총회에서 한국은 프랑스의 유엔대표 쇼벨(Chauvel,J.)을 비롯하여 미국·영국·중국 등 20여개 국 대표들로부터 승인약속을 받아 12월 12일 유엔정치위원회에서 48 대 6이라는 절대다수로 대한민국이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됨으로써 우리는 정부수립 즉시 파리유엔총회에서 건국외교의 기반을 닦게 된 것이다.

1949년에 접어들면서 미국(1.1.)·중국(1.3.)·영국(1.18.) 등이 대한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는 외교절차를 밟게 되었는데, 프랑스는 2월 15일 한국을 정식승인함으로써 국교를 재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 제4공화국 정부는 4월 주한프랑스공사관을 서울에 설치하고(초대공사 Henri Costiles), 이와 상응하는 조처로 한국도 공진항(孔鎭恒)을 초대공사로 임명, 파리에 대한민국공사관을 개설하고 오리올(Auriol,V.) 프랑스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함으로써, 양국은 43년 만에 다시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유엔상임이사국으로서 미국과 공동보조를 취하여 유엔군의 한국파병을 결의하고, 7월 22일 프랑스 국내의 여론이 찬반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에서도 프랑스군의 한국파병을 발표하여 29일 먼저 라 그랑디에르호(La Grandiére號)라는 소형구축함을 파견하여 유엔군 사령부 산하에서 작전중인 미해군함대에 배속시켜 작전임무를 수행하였다.

8월 24일에는 유엔군 프랑스대대를 지원병으로 창설하여 유엔군 산하 프랑스지상군이라는 특수부대를 한국에 파견하였다(11.29. 부산상륙). 프랑스군은 유엔군 프랑스대대라는 이름으로 12월부터 휴전 때까지 전쟁에 투입되어, 비록 대대병력에 불과하였으나, 쌍터널전투·지평리전투·단장의 능선 격전·281고지전투 등에서 훌륭한 전과를 올려, 유엔 16개 국 참전군대 중에서 가장 용감하게 싸운 군대로서 한국전쟁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외인부대감독관 출신인 베르네(Bernet,M.) 중장이 대대장에 자원하여 프랑스대대를 지휘함으로써, 그의 탁월한 지휘능력과 프랑스국민 특유의 국민성으로 사기가 드높았던 이 부대는 전쟁중 1개 대대만 참전하였으나(1952년 6월 30일 현재 1,185명, 1953년 7월 1일 현재1,119명), 연인원 3,421명이 동원되어 전사자 262명, 부상 1,008명, 실종 7명, 포로 12명(휴전 후 송환됨)의 손실을 보았다.

휴전 후 10월 22일에서 11월 6일까지 모두 철수한 프랑스대대는 유엔군 프랑스대대의 6·25참전의 상징으로 50명 정도의 분견대를 잔류시키다가 1965년 6월 전원이 한국을 떠났다.

귀국한 프랑스장병들은 1955년 9월 10일 프랑스군 중대장 출신인 드 카스트리(De Castris)를 회장으로 프랑스한국전참전용사회를 350명의 회원으로 발족시켜 오늘날까지 프랑스의 중요한 친한단체로서 한·프랑스간의 유대강화에 노력하고 있다.

② 한·프랑스 협력시대의 개막과 관계증진 : 6·25참전으로 한국을 이해하게 되었으나 프랑스는 제4공화국 말엽에 제기된 국내 정치·경제의 혼란으로 휴전 후에 양국간의 관계는 특기할 만한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58년 10월 드골의 제5공화국 출범과 더불어 양국은 새로운 협력관계를 모색하게 되었다.

먼저 양국은 10월 10일 공사관에서 대사관으로 승격시키는 외교관계를 강화하고, 양국관계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와 한국은 국내적으로 5·16군사정변에 의한 새로운 질서의 확립과 국제적으로 아시아·아프리카·중동 세력의 등장 및 미·소의 데탕트에 의한 정세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대서구외교에 있어서 고위인사 및 사절단파견 등 방문외교를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명분 위주의 1950년대 외교방식에서 탈피, 경제적 자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프랑스·서독·영국 등 서구선진국들과 통상증대·경제협력 등 경제외교에 주력하게 되었다.

양국간에는 상표협력협정(1961.2.)·관세협정(1963.4.)·특허권 상호보호협정(1963.4.)·사증면제협정(1967.4., 1980.8. 프랑스측 일방 폐기)·문화 및 기술협력협정(1968.5.)·한·프랑스기술초급대학설립협정(1971.12., 1972.11.29. 발효)·민간항공협정(1974.6.)·원자력의 평화적 이용협력협정(1974.10.)·투자보장(쌍무)협정(1975.1.)·투자보장(쌍무)협정 가서명(1975.11., 1977.12.8. 서명, 1979.2.1. 발효)·이중과세방지협정(1979.6.)·어업협정(1980.9.)·과학기술협력협정(1981.4.) 등을 체결하였다.

한국은 1959년부터 프랑스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였고, 1960년대 초부터 양국 교역증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외교적인 면에서도 한국은 1960년대 아프리카 신생 제국의 대거 출현에 주시하여 주프랑스대사관을 아프리카진출의 교두보로 삼고 대아프리카외교에 전력을 다하였다.

특히, 1960년대 하반기부터는 프랑스의 대한경제협력에 대한 관심이 증가추세에 있었는데, 1959∼1980년 사이의 프랑스로부터의 자본도입은 8억 1,000만 달러이다.

그 주요 내역은 어선건조차관(2,000만 달러), 어선차관(1,867만 9,678달러), 팔당수력발전소건설(1,500만 달러), 원유수송선도입(1,890만 달러), 선로개량사업차관(1,677만 달러), 원자력발전 제9·10호기, 포항제철3단계확장공사, 정유공장, 알루미늄공장 등이다.

특히, 원전 제9·10호기(17억 6,000만 달러 상당)를 프랑스 프라마통사(Pramatom社)가 수주한 것을 계기로 프랑스는 앞으로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에 소요되는 각종 기자재를 공급하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방위산업·철도·지하철·전화·전기 분야 등에서 대프랑스기술협력을 비롯하여 대프랑스 수입이 증가하리라는 전망이다.

또한, 프랑스는 우리의 중요한 교역상대국으로서 유럽국가 중 독일·영국·네덜란드·노르웨이에 이어 제5위의 수출국이다. 수입은 독일·영국에 이어 제3위이다. 통상은 1988년의 경우, 대한수출 11억 3,485만 달러(원자로·전동기·철강), 수입 10억 6,989만 달러(송신기기·컴퓨터부품·섬유류·선박)를 기록하였다.

양국간의 교역량의 확대와 경제협력의 증진은 관세협정·문화 및 기술협력협정 등의 체결을 비롯하여 양국 각료급 고위인사들의 상호방문 및 경제외교에 힘입은 바 큰 것이며, 이러한 경제협력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1980년 11월에 열린 제5차 한·프랑스경제협력위원회 합동회의에서는 건설·항공전자·전기·정보산업·공공토목·원자력 업체 등 프랑스에서 매출액이 최소한 연 10억 달러 이상이 되는 23개 주요 업체가 참가하여 구체적인 대한 경제협력사항에 상호협의하기로 합의하기도 하였다.

또한, 외교적인 면에서 1981년 5월 지스카르 데스탱(Giscard d'Estaing,V)의 보수정권은 종래와 변함없이 경제협력 증진에 노력했으나, 사회당 정권 출범 이후 1984년까지 프랑스의 북한승인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어 점차 대형화될 가능성이 있는 한·프랑스경제협력 등 현안문제를 둘러싸고 양국관계가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결국, 프랑스 정부는 1984년 12월 파리주재 북한통상대표부를 일반대표부로 격상시킴으로써, 이것이 프랑스의 북한승인의 예비단계조처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짙게 하면서 한·프랑스 양국간의 앞날에 암운이 비치는 것으로 우려되는 바가 컸다.

그러나 1985년 4월 초 파비위스(Fabius,L.) 수상의 내한으로 프랑스가 북한을 승인하지 않을 것임이 재확인되었으며, 양국 경제협력관계 증진·양국 대통령의 상호방문 합의 등 양국은 한·프랑스 관계사상 새로운 장을 펼칠 획기적인 전환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수상의 방한은 한·프랑스 외교사상 최초의 내한이었다는 점에서 외교사적 의의가 크다 하겠다. 이상과 같은 1980년대까지의 양국의 협력발전은 그 동안 꾸준한 양국의 정책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양국은 쌍방간의 정책협의를 위하여 정책협의회를 정례화하였는데, 제1차 한·프랑스 정책회의가 1985년 11월 18일 파리에 개최된 2년 후인 1987년 3월 10일에서 11일에 걸쳐 제2차 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으며, 이후 제3차(1991.9.4., 서울)·제4차(1992.5.26., 파리)·제5차(1993.3.15., 서울)·제6차(1995.12., 파리), 제7차(1997.4.16., 서울)를 비롯하여 1999년 파리에서 제8차 한·프랑스 정책협의회 개최가 현재 논의 중에 있다.

이 밖에도 한·프랑스 양국의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제1차 한·프랑스 포럼이 1995년 11월 23일에서 24일에 걸쳐 서울에서 개최된 이래 제2차(1997.11.23.∼11.24., 파리)·제3차(1998.6.25., 서울)로 이어져 양국 지성인간의 폭넓은 이해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양국간의 교역규모는 그 동안 꾸준히 증가되어 왔으며, 1995과 1996년에는 약 34억 달러 수준을 유지하던 중 1997년부터 감소하였으며, 이러한 추세는 1998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양국의 경제와 무역규모에 비추어 볼 때 양국간 교역은 확대될 여지가 많으며, 교역의 확대 균형을 위한 상호 노력 강화가 필요하다.

세계 무역에서 프랑스와 한국은 각각 4위, 11위의 교역국이며, 한국은 프랑스의 20위 교역 상대국이다. 최근의 한·프랑스 교역 현황은 1995년 35억 달러(수출 12억 달러, 수입 22억 달러)이고, 1997년에는 32억 달러(수출 14억 달러, 수입 18억 달러)이었다.

2015년 현재 한국의 대프랑스 수출액은 25억 8100만 달러고 주종목은 선박, 승용차, 축전지, 자동차 부품 등이다. 수입액은 61억 5700만 달러고 주종목은 항공기, 화장품, 의약품, 펌프 등이다.

프랑스의 대한투자는 지속적으로 증가 중인데, 한국의 경제위기 타개를 위해서는 외국인 투자유치가 더욱 긴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스의 보다 적극적인 투자가 기대된다.

양국간의 투자현황(1997년 누계)을 보면 프랑스의 대한투자는 113건에 8.5억 달러(유럽연합 기업의 대한투자의 13.6%로서 유리제조, 플라스틱·화학·기계·유통업·화학 부문)이며, 한국의 대프랑스 투자는 33건에 2억 달러(대유럽연합 투자의 10.2%로서 승용차·부품·섬유·전자·전기제품·C-TV·C-TV용 CP)이다.

1998년 4월 아시아태평양경제정상회담(ASEM) 및 양국 정상회담에서 약속된 유럽연합 회원국의 대한투자 사절단 파견계획에 따라 프랑스 투자사절단이 6월 29일에서 30일 사이 방한하였다.

이는 약 35명의 유수 기업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우리 정부 부처(외교통상부·재정경제부·산업자원부·건설교통부 등)를 방문하고 개별상담회, 한·프랑스 최고경영자클럽 합동회의(주제발표회·투자환경 설명회)에 참석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양국간에는 위와 같은 양국 협력증진을 도모하기 위하여 한·프랑스 이중과세 방지협정(1991.4.9.), 한·프랑스 환경협력 약정(1994.3.28.)·형사법 공조조약(1995.3.) 등을 체결하였다.

또한 양국 단기 파견근로자의 사회보장 기여금 이중납부 문제를 해소함으로써 양국간 교역·투자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프랑스 사회보장 협정의 체결을 추진 중에 있다.

양국간의 협력증진은 양국 정상간의 상호방문으로도 상징된다. 1986년 4월 14일에서 16일 사이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방불에 이어 1989년 11월 30일에서 12월 2일 사이 노태우(盧泰愚) 대통령도 방불하여 미테랑 프랑스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하여 양국 관계증진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1998년 7월 10일에서 14일에는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가 월드컵 폐막식 참석차 방불하였다.

프랑스측에서도 1990년 10월 18일에서 22일 사이 시라크 파리시장(현재 대통령), 1991년 5월 1일에서 3일 사이 로까르 총리의 방한에 이어 1993년 9월 14일에서 16일 사이 미테랑 대통령이 방한, 한·프랑스 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양국간의 관계증진에 따라 한국인의 프랑스 진출도 괄목할 만하다. 1997년 재프랑스 교민 수는 1만 1067명이었으며, 이 중에서 교민은 1,264명이고 장기 체류자는 9,803명(유학생이 전체 한인의 60%, 파리지역 거주 한인의 전체 70% 차지)이었다. 2014년 현재 재프랑스 한인은 1만 5000여 명이다.

최근 한·프랑스간 주요 문화교류로서 아비뇽연극제 참가(1998.7.13.∼21.), 몽펠리에 국제무용제 참가(1999년 하반기), 디죵 국제민속제 참가(1998.8.31.∼9.60.) 등이 있다. 또한 파리 기메박물관 한국실 확장 개관이 1999년 국제교류재단의 지원하에 현 17평 규모의 한국실을 80평 이상으로 독립 확장하였다.

프랑스의 한반도 정책과 북한과의 관계

(1) 프랑스 제5공화국의 한반도정책

프랑스의 한반도에 대한 태도는 일반적으로 긴장요인이 상존하고 있는 한반도의 현 여건하에서 남북한의 통일전망을 실제로는 요원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한반도를 둘러싼 세력균형을 토대로 한 현체제가 한반도와 그 주변의 극동평화 유지에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프랑스는 우리의 남북대화를 통한 평화통일정책을 현실적·합리적인 방안으로 지지해 오고 있다. 1991년 9월 유엔총회에서의 의결로 통과된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찬성했으나, 그 동안 소련 및 중국의 거부권행사로 현실적으로 가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이를 제의하는 것은 실익이 없다고 평가했었다.

현 사회당 정권은 실리관계를 토대로 한 기존 우호협력관계의 확대를 추진하는 한편 대북한승인문제는 한·프랑스우호협력관계 유지원칙과는 별도의 차원에서 검토해 온 바 있는데, 랭군테러사건으로 북한의 무력적 모험주의 및 한반도문제의 현실적인 심각성을 재인식하면서 북한승인문제는 1984년 12월 11일 파리주재 북한통상대표부를 일반대표부로 격상허용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사회당 정권의 출범 후 4년간 미테랑 정부는 북한승인문제와 한·프랑스우호협력관계 유지원칙은 수정한 일이 없으므로 프랑스의 북한승인문제는 원칙상의 전제로 남아 있었으며, 이 원칙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은 원칙과 현실의 차이 때문이었다. 공익과 실리가 프랑스의 전통적인 외교방식임을 감안할 때 사회당 정부가 원칙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1985년 4월 초 수상의 방한을 계기로 북한불승인을 재확인함으로써 한·프랑스 양국간의 현안문제를 타결하게 되었다.

(2) 북한과의 관계

프랑스는 1960년대 후반기부터 민간차원에서 대북한관계(주로 교역)를 시도하여 1968년 5월 프랑스민간무역사무소(1978.8. 폐쇄)를 평양에 설치한 것을 계기로 같은 해 9월 북한의 파리주재 민간무역대표부가 프랑스 정부에 의하여 허가되었다.

북한은 이 대표부를 근거지로 영국을 비롯한 북유럽제국과 서독 등에 침투, 활동해 왔으며, 1976년 11월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본부 상주대표부의 설치를 허가받아 파리에 2개의 대표부를 두게 되었다.

1991년 이후로는 일반대표부에서 업무를 흡수하여 유네스코(국제교육과학문화기구) 사무실은 유지하지만 평상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유네스코 본부사무국에는 북한 출신 직원 7명이 근무하고 있다.

한편 1976년 6월에는 민간무역대표부를 통상대표부로 격상시켰으며 1984년 12월 다시 일반대표부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나, 이는 사실상의 격상이다. 이러한 북한의 파리진출에 따라 파리에는 친북한단체들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친북한단체의 활동으로 1982년 말 프랑스 상원의원이 평양과 서울을 다녀가 화제가 되었으며, 그가 죽은 다음 미테랑 대통령의 특별보좌관 역시 서울과 평양을 다녀간 일이 있다.

교역의 측면에서 프랑스는 1970년대 초 석유화학 플랜트수출을 북한과 계약, 연간 20만 톤의 납사를 분해하여 베틸린 6만 톤과 프로필렌 3만 톤을 생산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북한의 대프랑스 중요수출품은 금·아연·연괴 등 광산물이며, 수입품은 기계 및 선반 등 각종 기계류·밀가루 등이다.

주요 경제협력으로는 프랑스·북한합작 호텔건설사업이 있다. 이는 1985년 2월 26일 프랑스의 캉프뇽·베르나르상사와 북한 제일설비사 사이에 평양시 호텔합작건설협정이 프랑스정부의 허가를 조건으로 서명되었다.

문화교류관계로서는 프랑스외무부 문화총국장 부테(Boutet)가 1984년 10월 평양에서 프랑스·북한문화교류의사록에 서명하였는데, 양국측 의사록을 초안하던 중 문화행사 제의와 서커스단 파견 등 구체적 사항을 삭제하고 일반적·의례적 문구만을 삽입하였으며, 북한어학연수생을 프랑스 정부가 접수할 것을 원칙으로 수락하였다.

프랑스와 북한간의 통상관계는 북한 기준 무역량으로 1990년 수출 1580만 달러(수입 1200만 달러)이고, 1991년에는 수출이 1240만 달러(수입은 820만 달러)이며, 1992년에는 수출이 1700만 달러(수입은 1130만 달러)이다. 그 뒤 1993년도에는 수출이 1930만 달러(수입은 600만 달러)에 달하였다.

주요 수출입(북한 기준) 품목 가운데 수출 부문은 산화마그네슘·박하유·합성제 의류 및 합섬사·우표 및 수입인지·기초컴퓨터 부품이며, 수입품은 금속가공기계 및 선반·의학기기 등 각종 기계류·항공기·계측기기·기관차 및 부품, 정유용 촉매·마그네틱 철판·천연고무·니켈·카드뮴·축전지 등이다.

한편 1992년 3월 16일에서 23일 사이 파리에서 조선영화 주간행사가 개최되었으며, 1992년 10월에서 12월 사이 북한 국립 서커스단이 방불하여 공연한 바 있다.

(3) 전망

1980년대 중반기의 한반도정세가 남북대화 재개 등 내부적인 해빙에로 접근하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 수상의 방한은 한·프랑스관계의 재조명이라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미묘한 한반도정세에 대한 서구 제국의 실질적 관심을 제고시키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유리한 국제환경이 조성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는 의미에서 뜻깊은 일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 프랑스 국내정치에 따른 사태변화는 6·25참전국으로서의 전통적 우의와 경제협력을 부분적으로 퇴조시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프랑스 수상의 양국 관계사상 최초의 방한은 지난날의 한·프랑스관계를 반성하고 장래에 대한 양국의 공동적인 시각을 갖기 위한 양국 지도자간의 해후이며, 또한 양국 관계발전에 밝은 전망을 기약하는 의의를 갖고 있다.

양국은 먼저 한반도문제와 관련하여 현 국제정치적 인식에 있어서 맥을 같이해야 된다고 보는 것인데, 한반도의 분단을 이용하여 경제협력의 실리를 추구하려는 움직임 같은 것(예를 들면 프랑스의 북한승인문제)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프랑스와의 새로운 차원의 협력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전략으로서 먼저 프랑스와의 제휴에 의한 한국의 제3세계에의 합작진출 등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한·프랑스 합작투자방식을 통한 한국의 수출시장 다변화와 대아프리카진출은 양국간의 이상적인 협력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양국간의 협력은 성실한 자세로 양국의 상호이익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진정한 협력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할 것이며, 양국수교 100주년을 넘어선 역사적인 대전환기에서 양국 관계증진의 밝은 전망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1986년 전두환 대통령 방불시 미테랑 대통령이 언급한 바와 같이 더 이상 북한에 대하여 호의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임을 재확인한 바가 있다. 현재 좌우 동거정부에 있어서 프랑스의 대한반도 정책은 1998년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88년 7월 7일 대통령 선언에 다른 대북한 대화추진 노력 등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하여 프랑스는 계속 지지하고 있다.

특히 대북한 관계개선 문제는 북한의 기본적인 정책변화가 이뤄지고 남북대화의 의미있는 진전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며, 또한 유럽연합 제국 및 한국과 긴밀한 협의하에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 현 동거정부의 입장이다.

거시적 관점에서의 프랑스의 외교정책은 18세기 이후 미국과 대서양을 넘나드는 협력관계 강화에도 힘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과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유럽-지중해 연안국가간의 협력관계 구축은 프랑스외교의 핵심축이 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에서의 평화협상도 지역전체의 안보·정치적 안정, 경제발전을 위한 결정적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이와 병행해서 프랑스는 눈부신 경제성장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국제무역과 현대사회의 변화에 중추적 역학을 하게 될 아시아 국가와의 협력관계도 강화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랑스의 대한반도 정책은 모든 부문의 협력관계를 더욱 다질 것으로 전망된다.

프랑스 안의 우리 문화

프랑스는 우리나라가 외국과 대외관계를 수립하기 훨씬 전인 19세기 초엽부터 가톨릭을 통하여 서구 열강 중 가장 먼저 우리나라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나라이다. 그때부터 한국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오늘날 프랑스는 명실공히 유럽 한국학의 중심지라고 부를 수 있게까지 되었다.

(1) 1910년 이전의 한국관계 문헌

프랑스의 한국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표현의 시초는 ≪하멜표류기≫의 번역출판이라 하겠다. 이 책은 1668년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된 지 2년 후인 1670년에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파리에서 작은 단행본으로 나왔다.

네덜란드어(플래밍어)보다 세력이 강한 프랑스어본이 나옴으로써 영어로 번역이 되는 등 당시에 한국의 사정을 알리는 데 큰 구실을 하였고, 19세기 중엽까지 우리나라에 대한 유일한 참고자료로 이용되었다.

즉, 그 이후에 나온 백과사전류와 여행관계 서적들은 모두 ≪하멜표류기≫의 내용을 베껴 썼던 것이다. 1736년에 나온 샤를르보아(Charlevoix) 신부의 ≪일본사≫ 제2권에는 ≪하멜표류기≫의 제2부에 해당하는 ‘조선 왕국 서술’ 부분을 전재(全載)하였다.

듀 알드(Du Halde) 신부는 조금 다르게 1735년에 4권으로 출판된 그의 ≪중국 및 대달단국지≫의 제4권에 35면에 걸쳐 중국자료에 의거하여 우리나라의 고대사와 지리에 대하여 썼다.

한반도가 어느 정도 실제지형과 비슷한 윤곽을 가지고 프랑스의 지리학자들이 만든 지도에 등장하는 것은 모르티에(Mortier,P.)의 <청제국도 淸帝國圖>(1650년경), 장 블로(Jan Bleau,J.)의 <일본도 日本圖>(1655), 벨랭(Bellin,J.)의 <일본 및 캄차카도>(1735) 등이고, 프랑스 신부들이 과학적으로 측량한 자료를 기초로 하여 당빌(d’Anville)이 제작한 대형 <중국신지도첩 中國新地圖帖>(1737) 중의 달단도에는 한반도가 비교적 정확하게 나와 있다. 이 지도들은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과 해군성 고문서관에 있다.

루이 16세가 세계탐험을 위하여 파견한 항해가 라 페루즈(La Pérouse) 대령이 1787년 5월 동해안을 지나다가 울릉도를 발견하고 다쥬레(Dagelet)도로 명명하였으며, 1849년에는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가 독도를 발견하고 이를 리앙쿠르도(바위섬)라 하였다. 이 명칭들은 20세기 중엽까지도 서양지도에 사용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서양의 해군함정들이 서해안과 남해안에 출현하였는데, 이때 프랑스의 해군함정들이 작성한 해도(海圖)들이 해군성 고문서관에 있다. 이들 지도에는 동해가 오늘날의 ‘일본해’와는 달리 동해의 번역인 ‘Mer de l’Est’로 나타나 있다.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또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중국에 있던 프랑스 신부의 밀입국 때 길을 안내하기 위하여 1846년에 작성하여 보낸 조선전도가 보존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울릉도 바로 옆에 따로 우산도라 하여 조그만 섬이 있는데, 이는 독도를 나타내고자 하였으나 이름과 위치를 혼동하여 그렇게 된 듯하다.

프랑스가 한국에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831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가 파리외방전교회에 한국에의 가톨릭 전파 임무를 맡김으로써이다. 따라서, 중국을 통하여 1836년에 모방(Maubant,P.) 신부가 최초로 숨어들어와 우리나라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고, 그 몇 달 뒤인 1837년에는 앵베르·샤스탕(Chastan,J.) 신부가 뒤따라 들어왔다.

그때부터 조선의 내부사정이 가톨릭 잡지인 ≪신앙전파≫를 통하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천주교를 박해하던 조선의 왕정과 관리들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적대적이고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나 당시의 조선의 내부사정을 부분적이나마 알리고 있었다.

1837년에 천주교박해로 세 프랑스신부가 순교하고, 1845년에 마카오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된 김대건과 함께 페레올(Ferréol,J.J.)·다블뤼(Daveluy,M.A.N.) 두 신부가 밀입국하여 당시에 순교하고, 리델·페롱(Féron,S.)·칼레(Calais,A.) 세 신부는 숨어 있다가 중국으로 도망하였다. 리델 신부는 이 사실을 주북경 프랑스공사 드 벨로네에게 알렸다.

리델은 1878년에 다시 조선에 들어와 전교하다가 잡혀 감옥살이를 한 뒤 중국으로 추방되었는데, 프랑스에 돌아와 1879년에 ≪옥중기≫를 썼다. 이는 당시의 감옥생활을 소상히 알리는 귀중한 자료이다.

황사영의 백서는 작성 당해인 1801년의 박해 때 압수당하여 의금부 창고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에 발견되어 조선교회 주교인 뮈텔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어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조선순교복자 79명의 사복식이 거행될 때에 교황에게 전달되어 지금은 로마교황청에 보관되고 있다.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에는 우리 나라에 가 있던 프랑스 신부들이 써 보낸 많은 서한과 순교한 프랑스신부 및 한국인 교인들의 유품들이 있다.

프랑스는 영국(1842)에 이어 1844년 중국과, 1858년에는 일본과 통상우호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랑스는 극동에 진출하고 있던 유일한 가톨릭국가였으므로 극동의 가톨릭보호국으로 자처하였고, 영국과 함께 중국에 극동함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의 박해소식을 전해 들은 드 벨로네 공사는 조선정부를 응징하기 위하여 극동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이 이끄는 전함 3척을 강화도에 파견하였다.

프랑스함대는 리델 신부의 안내를 받아 1866년 9월 18일 중국을 떠나 강화도에 도착, 11월 22일 철수할 때까지 약 2개월간 강화도에 머물렀다. 프랑스해군은 강화도에서 물러나면서 강화서고에 보관되어 있던 책 342권을 가져갔다. 그 중 297권은 필사본이고 45권은 인쇄본이다.

의궤(儀軌)가 그 주를 이루는데, 이 책들은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 주어졌다. 오랫동안 베르사유의 도서관 별관에 방치되었다가, 1970년대에 그 가치가 인정, 보수되어 파리의 본관 동양서적관으로 옮겨져 소장되었다. 1993년 당시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우리의 김영상 대통령에게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시사했고, 이후 여러 차례의 협의를 거치다가 2010년 11월 12일 이명박 대통령과 프랑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합의하면서 반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2011년 5월 26일 3차분의 의궤가 들어옴으로써 총 297책 전부가 국내에 들어왔다. 병인양요 때 약탈된 뒤 정확히 145년만의 일이다. 현재는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프랑스해군의 강화도 파병을 보여주는 펜화(筆畵) 8장이 주간 시사 ≪화보≫에 1867년 1월과 2월 3회에 걸쳐 실렸다. 아직 사진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이므로 19세기 말까지 화보의 그림들은 필화였다.

이 그림들은 강화도 파병에 참가한 주베르(Zuber,H.)의 크로키를 바탕으로 그린 것들이다. 주베르는 그 뒤 풍경화가로서 상당히 이름이 알려지게 되는데, 현지에서 직접 보고 그린 그의 그림은 묘사가 생생하고 사진으로 보는 것만큼 현실적이다.

그림은 정장을 한 사회 각 계층의 남자를 그린 것(평민, 군복을 입은 弓手, 양반, 병졸), 프랑스해군함정의 강화도 도착장면, 강화도 전경, 강화아문의 프랑스해군 열병, 강화도 전투장면, 강화산성, 화포와 조총 등 9점의 무기와 갑옷을 보여준다. 이것은 조선풍물의 실상을 깊이 있고 생동감 있게 그린 그림으로 서구에 소개한 최초의 예가 아닌가 생각된다.

주베르는 그 뒤 자신이 그린 펜화를 곁들여 강화도 파병 당시의 자신의 체험기를, 세계 풍물을 화보로 소개하는 정기간행물 ≪세계일주≫(1873)에 실었다. 인물, 강화도 풍경과 서민들의 생활을 묘사한 펜화 9점과 당시 조선지도를 바탕으로 그린 조선전도 1점도 들어 있다. 전투에 참가한 해군대위 주앙(Jouan)도 전투 상황과 한국에 관한 글을 두 편 발표하였다.

그 다음해인 1874년에는 ≪하멜표류기≫ 이래 한국을 가장 상세하고 정확히 서구에 소개하는 데 이바지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달레(Dallet,C.) 신부의 ≪조선교회사≫가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A5판 2권으로 된 이 책은 총 982쪽인데, 제1권의 192쪽에 달하는 서문에서 한국의 지리 및 토질에서부터 국제관계에 이르기까지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다.

한글로 훈과 음을 단 천자문, 한글발음표, 한글 천주경, 한글 성모경의 복사전재 및 조선전도(24×40㎝)가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에도 울릉도 바로 옆에 우산도(독도)가 나와 있는데, 위치와 명칭이 잘못 잡혀 있다. 본문에서는 가톨릭 전래 이래 병인양요까지의 조선천주교회사를 다루었으며, 당시의 조선사정도 세밀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 밖에 프랑스선교사들의 수난과 조선의 천주교인들이 당한 박해에 관한 소책자 및 순교한 프랑스선교사들의 전기 몇 권이 나왔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로네(Launay,L.) 신부가 <조선과 프랑스선교사들>(1901)을 썼는데, 달레의 ≪조선교회사≫ 내용의 요약이고, 끝 부분에 1866년 이후의 조선실정을 소개하였다. 그 책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조선풍물을 그린 펜화 21장과 김대건을 포함한 프랑스순교자들의 초상화들이다.

1880년에는 한국어-외국어 사전의 효시인 ≪한불사전≫이 빛을 보았다. 원고는 프랑스선교사들이 집필한 것이며, 당시 우리 나라에 프랑스어 활자가 없어서 그러하였는지는 모르나 일본의 요코하마(橫濱)에서 인쇄되었다.

이듬해에는 역시 선교단에 의하여 ≪한국어문법≫이 요코하마에서 출판되었다. 외무성의 영사이며 중국어 통역관인 앵보 위아르(Imbault Huart,C.)는 ≪프랑스인을 위한 한국어 구어(口語) 독본≫(1889)을 저술하였다.

1894년에는 샤이에 롱 베(Chaillé Long Bey) 대령의 ≪조선≫(1894)이 출판되었다. 그는 1890년대 초에 주한미국대사관의 서기관·총영사·공사대리를 지냈다. 그의 책에는 한국의 민속화가가 그린 소박한 민속판화 20점, 풍경 펜화 5점 및 제주도 지도 1점이 들어 있다. 그는 하멜 이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제주도를 여행하였다.

1894∼1895년에는 청일전쟁이, 1904∼1905년에는 러일전쟁이 각각 발발하였다. 이 두 전쟁은 한반도에 대한 패권을 두고 열강들이 벌인 전쟁이었다. 이를 계기로 서양의 기자들이 종군하여 한국을 접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시사 ≪화보≫와 여행관계의 ≪세계일주≫는 여러 편의 기사와 함께 한국의 인물 및 풍경 펜화 또는 사진을 실었다.

이 시기에 나온 대표적인 책으로는 부르다레(Bourdaret,E.)의 ≪한국에서≫(1904)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중판에 재판을 거듭하여 인쇄되었다. A5판 357쪽에 25장의 사진이 들어 있고, 한국의 정치·사회 등 전반적인 분야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민간신앙과 무속·미신에 관하여 상세히 언급하였다.

그는 프랑스에 돌아와 1903년과 1904년에 한국의 고인돌, 강화도의 선사유적, 한국인의 인종학적 고찰 등에 관하여 강연을 한 다음, 리옹의 인류학회지에 글로 발표하였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프랑스에 발을 디딘 사람은 홍종우이다. 그는 1890년 12월 파리에 도착하여 1893년 7월까지 체류하였는데, 파리의 동양관계 기메박물관(Musée Guimet)에서 일하면서 지냈다.

그는 인종학자 및 지리학자들뿐만 아니라 동양에 관심이 있는 프랑스인들의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대단한 반일감정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많은 프랑스의 지식인·예술가·학자 등과 교분을 맺을 수 있었다.

그의 도움을 받아 소설가 로니(Rosny,J.H.)는 ≪춘향전≫(1892)을 번안하여 당튀(Dentu)출판사의 문학문고 중의 하나로 출판하였다. 왜소한 책(7.5×13.5㎝, 140쪽)으로 조그만 글씨에 섬세하고 예쁜 펜화를 곁들였고, 역자는 작품에 관하여 간단한 서문도 썼다. 물론, 인물과 풍경은 서양 것에 가깝다.

홍종우가 프랑스를 떠난 뒤인 1895년에는 홍종우 번안의 판소리계 고전소설 <고목생화 古木生花>(1895)가 기메박물관의 도움으로 에르네스트 르루출판사에 의하여 출판되었다.

기메박물관은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떠나,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한국문학의 표본으로 출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책으로 낸다고 밝혔다. 이 두 번역작품은 우리 나라 문학이 처음으로 서구어로 번역되어 알려지게 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자못 크다 하겠다.

1897년에는 홍종우와 슈발리에(Chevalier,H.)가 한국어로부터 번역한 <각 사람을 보호하는 별을 길조(吉兆)로 만들며 한 해의 운수를 알 수 있는 안내서>라는 제목의 글을 기메박물관의 연보에 게재하였다. 우리 나라 점성술을 프랑스에 소개한 것이다. 홍종우는 바라(Varat,C.)가 한국을 여행하면서 수집해 온 민속자료를 분류하는 일을 돕기도 하였다.

그는 또 1880년대 기메와 함께 일본을 여행하고 온 극작가 겸 화가인 레가메(Régamey,F.)와도 교분이 있었는데, 레가메는 홍종우가 김옥균(金玉均)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뒤 홍종우에 관한 글을 동양학 학술지 ≪퉁바오≫(1895.5.)에 썼다.

회화 분야에서는 프랑스 사람으로 여기지는 드 메지애르(De Méziéres)가 1890년대 말 또는 1904년 이전에 고종의 공식초상화를 그린 바 있다.

(2) 한국유물의 수집

프랑스인에 의한 본격적인 우리나라의 민예품과 도서의 수집은 바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지 2년 후인 1888년 가을에 한국에 도착하여 다음해 초까지 머물렀다. 프랑스 문교성의 지원으로 한국을 탐험하게 되었다. 그는 서울에서 프랑스 공사관의 도움을 얻어 자료수집과 조사활동을 벌였다.

그 작업이 끝난 다음 우리나라 조정으로부터 내지통행증을 발급받아 서울을 출발하여 부산까지, 한반도 남반부를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종단하였다.

프랑스에 돌아와서는 여행담을 ≪세계일주≫(1892)에 <한국여행>이라는 66쪽의 글로 실었다. 그가 여행중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풍경과 인물 펜화 103점, 서민생활을 그린 민속판화 39점, 한양지도 1점, 조선전도 1점이 글의 중간중간에 들어 있다.

글의 서두에서 그는 그 글이 여행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보다 자세한 내용을 책으로 집필하여 낼 것이라고 예고하였으나 다음해(1893)에 죽고 말았다.

그의 수집품은 파리의 트로카데로인류박물관에 전시된 뒤 민예품의 일부와 서적 50권이 기메박물관에 들어갔고, 상당 부분은 분산되었는데, 그 중의 일부가 보르도대학교 의과대학 및 파리의 인류박물관에 있다.

프랑스 사람으로서 가장 체계적으로, 그리고 가장 많이 한국의 고서·골동·서화를 수집한 사람은 플랑시이다. 그는 서울주재 초대 프랑스공사로 1887년부터 1890년까지 3년간, 그 뒤 다시 1896년부터 1906년까지 10년간, 모두 13년간 한국에 근무하였다. 국립동양어학교 출신인 그는 이 학교 도서관에 고서 600권을 기증하였다.

특기할 것은 1880년대 말에서 1890년대 초에 서울의 서점에 나와 있던 고전소설이 빠짐 없이 들어 있어 흥미 있는 컬렉션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 뒤 1911년 3월 27∼30일 나흘 동안 플랑시의 한국·중국·일본 관계 소장품 883점이 드루오경매장에서 경매에 붙여졌다. 이 컬렉션의 주를 이루는 것은 700여 점에 달하는 한국 것이었다.

그 중 책으로는 ≪백운화상초록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直指心體要節≫(약칭 直指心經)을 비롯하여 ≪삼강행실도≫·≪오륜행실도≫·≪경국대전≫·≪대전속록≫·≪속대전≫·≪소학집성≫ 등 77권이었고, 그림 중에는 풍릉부원군 조문명(趙文命)의 초상화, 공조판서 정향복(鄭享復)의 초상화, 그리고 향로·식기 등의 동제품과 금속제품, 목제품, 칠기, 자개, 대리석 및 보석제품, 부채, 병풍, 비단, 가구, 2,500개의 동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77권의 고서 가운데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이 58권을 구입하였다. 고서 중에서 가장 귀중한 ≪직지심경≫과 ≪삼강행실도≫는 당시의 유명한 동양 골동품수집가 베베르(Vever)가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1943년 그가 죽은 뒤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되었다.

≪직지심경≫의 내용은 송나라 때 나온 <전등록 傳燈錄>에서 역대 불조(佛祖)들의 법화(法話)를 요약한 것이다. 이 책은 소실되어 없어진 청주 교외의 흥덕사에서 1377년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찍어낸 상하 두 권의 책 중 현존하는 유일한 하권이다.

이 책은 1234년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찍었다는 ≪고금상정예문 古今詳定禮文≫이 현존하지 않으므로, 서양 최초로 구텐베르크(Gutenberg,J.)가 1450년에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인쇄를 한 데에 비하더라도 80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로 인쇄한 유일한 물적 증거가 되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에 사용한 금속활자는 세계 최초인 것이 틀림 없으나, 인쇄기술 자체는 아직도 목판인쇄나 다를 바 없는 것이므로, 혁신적이고 실용적인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서양학자들은 보고 있다.

≪삼강행실도≫는 1434년에 세종이 설순(偰循) 등에게 명하여 목판인쇄한 책이다. 효행의 본이 될 만한 중국과 한국의 인물 35명의 이야기를 그림을 붙여 한문제목을 달고 한글로 설명한 것인데, 이 책의 그림은 프랑스의 미술에도 약간의 영향을 미친 바 있다고 한다.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또 귀중한 혜초(慧超)의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이 있다. 학자들은 두루마리로 된 이 자료를 9세기경 당나라 사람의 필사본으로 보고 있다. 앞뒤가 잘려나가고 제명도 저자명도 없으며, 한 줄에 30자씩 230줄, 총 6,000여 자의 짤막한 글이다.

당나라 승려 혜림(慧林)이 지은 <일체경음의 一體經音議> 제100권 속에 들어 있는 <혜초왕오천축국전>에 보이는 낱말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음을 간파, 곧 이것이 오랫동안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혜초의 여행기의 축약본임이 틀림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원래 3권으로 된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16세에 중국에 건너가 수학한 다음 뱃길로 인도에 도착하여 10년에 걸쳐 인도의 오국(五國)과 인근의 여러 나라를 순례한 다음 육로로 중국의 당나라 장안(長安)에 돌아와서 그 행적을 기록한 여행기이다.

혜초는 이 글을 727년에 지었는데, 이 책의 제2·3권에 해당하는 이 두루마리는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elliot,P.)가 1908년 중국 간쑤성(甘肅省) 둔황(敦熀) 명사산(鳴沙山) 천불동(千佛洞)의 석실(石室)에서 다른 중국자료와 같이 발견하여 파리로 가져와, 현재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는 당시의 중국과 인도와의 여로(旅路) 실크로드를 아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사료적 가치도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상에서 본 귀중한 문헌을 포함하여 프랑스에는 국립중앙도서관에 450여 권(고지도 35매를 빼고), 국립동양어학교에 630권, 기메박물관에 50권 등 전부 1,100여 권의 한국고서가 있다.

고서 이외에도 플랑시는 몇 점의 신라토기와 고려시대·조선시대의 도자기를 파리 근교의 세라믹박물관에, 책은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 민속유물은 인류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동양박물관인 기메박물관과 파리시립 체르누스키박물관에는 김홍도(金弘道)의 산수도·신라토기·고려자·그림·병풍·가구 등 한국유물들이 있으나 빈약한 편이다.

(3) 광복 이전의 한국연구

1864년 파리의 동양어학교(대학)에서 일본어 강의가 시작되었다. 일본어 강사인 로니(Rosny,L.d.)는 그 해에 <한국어에 대한 고찰>이라는 글을 ≪동양학보≫에 썼는데, 이것이 프랑스 학자가 발표한 한국에 관한 최초의 논문이다.

로니는 1868년 학교에 일본어과가 설치되면서 교수가 되어 1905년까지 재직하였다. 그는 1868년에 <한국의 지리에 대하여>를 역시 ≪동양학잡지≫에 썼고, 그 뒤에도 우리나라에 관하여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학문적으로 깊이 한국을 연구한 사람은 쿠랑이다. 그는 동양어학교에서 중국어를 공부한 뒤, 1888년에서 1890년까지는 주북경 프랑스공사관에, 1890∼1892년 사이에는 주서울 프랑스공사관에서 통역으로 일하였다. 그는 서울에 체류하는 2년 동안 규장각과 시내의 서점을 두루 찾아다니며, 한국의 도서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파리에 돌아와서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중국·일본·한국 책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면서, 서울에서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전3권에 달하는 ≪조선서지≫를 1894년에서 1896년 사이에, 증보판인 제4권은 1901년에 출판하였다. 이 책은 1899년까지 한국에서 나온 서적을 총망라한 것이다. 인용된 책의 수는 3,821권이며, 고전소설도 포함되어 있다.

도서의 내용 가운데 중요하거나 흥미 있는 부분, 특히 그림이나 도형은 그대로 복사하여 전재(轉載)하였다. 이 책은 한국서지학의 금자탑이라 할 정도로 위대한 업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책의 100여 쪽에 달하는 서문에서는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였는데, 이는 그때까지 한국에 관하여 외국인이 쓴 글 중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프랑스국립학술연구원의 부셰(Bouchez,D.)는 평가한다.

쿠랑은 ≪조선서지≫ 이외에도 한국에 관한 글과 논문을 여러 편 남겼다. 특히, 한국의 음악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서구에 소개하였으며, 1898년에는 광개토왕비에 대한 30쪽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한국이 참가하여 한국관에 한국의 전통물품을 전시하였다.

이때 쿠랑은 한국관을 소개하는 <1900년 서울의 추억>이라는 글을 써서 팜플렛을 만들었다. 이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한국의 공식적 홍보자료인 만큼 고종·왕세자(뒤의 순종)·플랑시, 한국관 관장 민영찬, 만국박람회 한국위원회위원, 조선 정부의 만국박람회 대표 알레백(Alévêque,C.), 고종의 막내아들, 내각총리 조병식(趙秉式), 외무대신의 인물사진 외에도 덕수궁·서울시가·왕좌 및 풍경사진 30점이 실려 있다.

한국관에는 고서를 비롯하여 서화·병풍·가구·동제품·자개제품·칠기 등 많은 전통물품이 전시되었는데, 그 물건들은 팔려 흩어졌는지 그 흔적을 알 길이 없다.

쿠랑은 또 1904년에 관광안내서 ≪한국≫을 저술하였다. 이는 권위 있는 아새트출판사의 마드롤 관광가이드 컬렉션 중의 하나인 <중국 북부 및 한국>편에 들어 있으며, 한국 부분은 45쪽에 달한다.

이는 서구에서 나온 최초의 전문적 관광안내서인 것으로 보이며,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를 계기로 10여 종의 프랑스어 한국관광안내서가 나올 때까지 이 분야의 유일한 프랑스어 책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는 한국과 주변정세·외교관계 등에 관해서도 글을 썼다. 동양어대학교의 교수 자리를 기다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0년에 리옹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어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가르치면서 한국문화에 대한 강의도 하였다. 그는 말년을 쓸쓸하게 지내다가 1935년에 죽었다. 리옹3대학교 본관 계단의 벽에는 쿠랑의 대리석 흉상이 있다.

일제강점하에서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를 계기로 상해임시정부 대표 김규식이 파리에 파견되어 김탕·여운홍(呂運弘)·조소앙 등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승인받기 위하여 외교활동을 벌였으나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반면, 1921년까지 ≪회람≫과 ≪자유대한≫이라는 정기간행물 발간을 통한 홍보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자유대한≫ 10책은 총 350쪽의 귀중한 자료집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에는 국권상실 이후부터 1921년까지의 한국사정, 외교사, 일본 및 한반도 주변정세뿐만 아니라, 한국에 관한 프랑스어서적 목록, 한국의 문화·언어 등에 관한 기사들이 들어 있다.

당시 뜻있는 프랑스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재프랑스 한인친우회(1921)가 결성되었다. 친우회의 조직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소르본대학 교수 샬래(Challaye,F.)는 1919년 한국과 일본을 여행하고 돌아와 한국에서의 일본의 탄압상과 인권유린을 폭로, 규탄하였다. 그는 1915년 ≪일본≫을 저술하였는데, 그 책 끝의 17쪽은 한국에 관한 것이다.

파리위원부의 활동은 강화조약 이후 황기환이 영국과 프랑스에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간 다음부터는 중단되었고, 한인친우회의 활동도 흐지부지되었다. 그 뒤 1934년 4월 2일 임시정부는 주프랑스 외무행서 외무위원에 서영해를 임명하였다. 독립선언에 서명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서영해는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역사소설(1929) 한 권과 한국민담집 한 권을 펴냈다.

역사소설은 자료로서나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없지만, 민담집 ≪거울, 불행의 씨 외 한국민담≫(1934)은 우리 고유의 대표적인 민담을 처음으로 프랑스어로 번역, 소개하여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파리교외 센-생드니 도립 알베르 칸박물관의 영화컬렉션 가운데 2편의 한국관계 기록영화가 있다. 하나는 1926년 4월 26일 승하한 순종의 장례식을 찍은 것(Gaumont영화사)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황실 귀족으로 유럽을 여행한 이은(李垠)이 남프랑스의 칸(Khan,A.) 저택에서 칸을 만나는 장면(13초)을 찍은 것이다.

프랑스의 대문호로서 한국을 방문하고 글을 쓴 사람은 로티(Loti,P.)뿐이다. 그는 해군장교로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슬란드의 어부≫를 썼고, 일본을 무대로 한 소설 ≪국화부인 菊花婦人≫은 대단한 베스트셀러가 되어 250여 회나 재판되었다. 그는 프랑스한림원 회원이기도 하였다.

그는 해군장교 시절, 승선하고 있던 함정을 따라 1901년 6월 17일 중국으로부터 제물포에 도착, 26일 일본으로 떠날 때까지 약 10일간 한국에 머물렀다. 그는 고종을 알현하는 포티에(Pottier) 제독을 수행하여 배석하였다.

이때 쓴 그의 기행 수필집 <매화부인(梅花婦人)의 제3의 젊음>(초판 1905) 가운데 ‘서울에서’라는 제목의 20쪽의 글은, 거리의 풍경과 왕궁묘사를 통하여 기울어져 가는 조선의 잔영을 잘 표현하였다.

피에르 라피트본(1923)에는 덕수궁의 옥좌를 구경하는 로티와 궁중무희를 그린 그림 2장이 들어 있고, 칼말-레비출판사본(1936)에는 담뱃대를 문 한 노인과 고종 및 황태자의 초상 천연색 삽화 2점이 곁들여 있다.

(4) 광복 후의 본격적인 한국학

프랑스의 교육·연구 기관에서의 한국학은 멀리는 로니(Rosny,L.d.)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다. 그러나 본격적인 한국어·문화의 교육과 한국연구는 이 분야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쿠랑에서 시작되어 제도적인 토대를 이룩한 아그노엘(Haguenauer,C.), 그 위에 골격을 세운 이옥(李玉)에서 현재의 교수진으로 연결된다.

프랑스에서 제도적인 바탕 위에 한국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1956년부터이다. 1956년은 연세대학교의 전임강사로 있던 이옥이 아그노엘의 초빙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소르본대학(파리대학교 문과대학)에서 한국어를 강의하기 시작한 해이다. 소르본대학에는 그 전년에 일본학과가 설립되어 아그노엘 교수가 과장으로 있었다.

아그노엘은 동양어대학에서 일본어를 공부한 다음, 1924년에 동경(東京)에 건립된 일불회관(日佛會館)의 최초의 장학생으로 일본에 가서 1932년까지 일본의 고대사와 언어를 연구하면서 한국에 대해서도 공부하였다. 프랑스에 돌아와 동양어대학에서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가르치면서 한국 것도 가르쳤고, 1928∼1956년 사이에 한국어와 한국고대사에 관하여 14편의 논문을 썼다.

일본학과는 1959년에 일본·한국학과로 명칭을 바꾸었다. 한국어는 그 해부터 동양어학사학위 필수 3과목 중의 하나였고, 소르본대학에서 가르치는 17번째 외국어가 되었다. 1956년의 교수진은 아그노엘 외에 일본어 전임강사 모리(森有正)와 한국어 전임강사 이옥 등 셋으로 구성되었고, 1964년에 일본어 전임강사 한 사람이 추가되었다.

1959년에는 동양어대학(프랑스혁명의 와중인 1795년에 설립)에도 42번째로 한국어강의가 개설되었다. 당시에는 같은 교수진이 양 대학에서 가르쳤다. 학생들은 3년과정을 마쳐야 동양어대학을 졸업하였으며, 3학년 때부터 소르본대학에도 등록하여 파리대학교의 동양학·한국어 학위과정을 이수하였다.

프랑스의 모든 대학은 국립이며, 대학의 학위는 국가학위이다. 1968년 대대적인 대학학제개편이 있었다. 이와 때를 맞춰 1968년 5월에는 문화기술협력협정을 맺어 한·프랑스 문화관계에 대한 제도적인 뒷받침을 마련하였다.

이때 파리대학교의 단과대학들은 각기 독립하여 점차 종합대학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동시에 많은 수의 대학이 신설되었다. 이를 계기로 소르본대학의 일본·한국학과는 일본학과와 한국학과로 분리, 독립되어, 중국학과 및 베트남학과와 함께 1970년에 파리7대학교에, 동양어대학은 파리3대학교에 소속되었다.

파리7대학교 동양학부 한국학과는 1970년대 초에는 이옥 과장을 중심으로 강사 2, 3명이었으나, 차츰 인원이 늘어나 1980년 말 교수진은 정교수 이옥(한국고대사), 부교수 프로스트(Prost,M., 언어학), 부교수 최승언(崔勝彦, 언어학) 외에 전임강사 2명, 강사 5명이었다. 그리고 교과과정은 1970년부터 교양과정(1·2학년), 학사과정(3학년), 석사과정(4학년), 박사과정까지이다.

전과정의 학생 수는 해마다 다소의 변동이 있으나 100여 명 내외이다. 1980년대 말까지 20여 명이 한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학과는 상당히 규모가 크고 독립된 도서실을 보유하고 있는데, 장서의 수는 2만여권에 달한다.

파리3대학교에 소속되었던 동양어대학은 1985년에 독립하였다. 이 대학에 있던 한국어과정은 학제개편시(1969)에 한국·일본학부 내의 한국학과로 되었다. 이때 파브르(Fabre,A., 언어학) 교수가 학과장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파브르는 프랑스 사람으로는 최초로 1962년에 소르본대학에서 한국어학위를 받았다. 그는 1989년까지 한국·일본학부장도 겸하였다.

교수진은 1970년대 초부터 1988년까지 파브르 외에 전임강사 2명(李炳珠·沈勝子, 언어학)이며, 이듬해 전임강사 1명이 추가되었다. 교과과정은 교양과정에서 박사과정까지이고, 학생 총수는 역시 100여 명이며, 1988년까지 1명이 한국관계로 박사학위를 마쳤다.

지방대학으로는 최초로 1988년에 리옹3대학교의 교양과정에 한국어 전공(1·2학년)이 설치되었다. 이 대학에는 그 밖에 1983년부터 한국어강좌가 개설되어, 한국어를 선택과목으로 택한 학생들과 일반인으로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같이 이수하도록 되어 있다. 이 과정을 주 2시간, 3년 이수한 일반인에게는 4대학학위인 한국어·문화 이수증이 수여된다.

1988년까지 교수진은 책임자인 부교수 이진명(李鎭明, 역사학)과 프랑스인 강사 1명, 한국인 강사 2명이고, 학생 수는 20여명이었다. 그밖에 한국어강좌가 설치되어 있는 학교는 지방의 보르도3대학교(1986)와 르 아브르대학교(1988)이다.

순수학문연구기관인 국립학술연구원에서 한국을 전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원은 고전문학 전문가로서 쿠랑을 연구하였고, 1988∼1990년 2년간 파리7대학교 동양학부장을 지낸 바 있는 부셰, 한국무속전문가인 기예모즈(Guillemoz,A.), 근대사 전공의 오랑주(Orange,M.)가 있고, 다른 연구원들도 부분적으로 한국을 연구한다.

이 세 한국전문가들은 파리7대학교와 국립사회과학대학에서도 강의를 맡았다. 그리고 국립사회과학원에서는 인류학 전공 버트란드 정(Bertrand Chung) 후임에 1999년 현재 알렉산드 길렘즈(Alexander G.)가 임용, 재직하고 있다.

1959년에는 파리대학교 내에 한국연구소가 설립되어 아그노엘이 소장이 되었다. 설립목적은 한국의 고대 및 현대 언어·문학·문화에 관한 연구, 프랑스에서의 한국에 관한 연구논문의 발간, 한국학자들의 연구업적의 프랑스소개 등이다.

처음에는 이름뿐이었지 인원이 없었음은 물론이요 변변한 연구실도 없었다. 그 뒤 1967년에 파리대학교 소속 동양관계연구소들이 윌슨가 22번지 ‘동양의 집’으로 이사하면서 한국연구소도 사무실과 도서실을 갖게 되었다.

1968년의 대학학제 개편에 따라, 이듬해부터 동양연구소들은 프랑스의 가장 권위있는 교육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Collége de France)에 예속하게 되었다. 1970년 아그노엘이 은퇴하고 이옥이 소장에 임명되어 1980년대 말까지 맡아왔다. 한국연구소는 다른 동양연구소들과 함께 1989년에 카르디날 드 르모안느가(街) 32번지로 이사하였다.

이곳에 이사한 한국연구소는 전보다 넓은 면적에 사무실과 5,000권의 한국관계 책을 보유한 도서실도 갖추었다. 이옥 소장 외에 연구소의 일반 업무는 국립학술연구소 연구원 오랑주가 맡았다.

이 연구소는 논문집인 ≪카이에 Cahiers≫와 단행본 규모의 연구업적을 싣는 ≪메모아르 Mémoires≫ 두 시리즈에 전부 12권의 한국학 관계 서적을 출판하였고, 한국전문가의 프랑스 초청, 한국문학에 대한 학술대회도 여러 차례 개최하였다.

한국관계 현대서적은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 5,000제명(題名), 동양어대학 도서관에 1,700제명(4,000권)이 있다. 이 두 도서관은 한국서적 담당 사서를 두고 있으며, 루브르박물관의 동양관인 기메박물관에는 한국유물전문가가 있으며, 2000년에는 한국실을 개관할 예정이다. 기메박물관은 재단지원으로 오는 2001년 10월 한국실 “Arts de Coree”를 개장할 예정이다. 프랑스의 한국학 학자들은 유럽한국학회(AKSE)에서도 중추적 구실을 하고 있다.

이 학회는 프랑스의 이옥, 네덜란드의 포스(Vos), 영국의 스킬렌드(Skillend)가 창립위원이 되어 1976년에 설립되었다. 이듬해에 제1회 유럽한국학대회가 개최된 이래 1991년 파리대회가 15회째가 되었다. 프랑스학자로 이옥·부셰가 회장을 역임한 바 있고, 현회장 역시 프랑스의 파브르이다.

이 대회는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가며 부활절 방학 때 열리는데, 서부유럽은 물론 소련을 포함한 동부유럽 학자들 및 다수의 한국학자와 3년 전부터는 북한의 학자들도 참가하여 자기의 연구결과를 발표, 토론하고, 학자 상호간의 교류와 친목을 도모하는데 해가 거듭할수록 성황을 이루고 있다.

1969년에는 권위 있는 ≪크새주 Que sais je?≫ 문고에서 이옥의 ≪한국사≫가 나온 것을 비롯하여, 프랑스에서는 광복 이후 현재까지 앞의 한국연구소 간행 서적을 포함하여 한국에 관한 100여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이는 한국의 언어·역사·정치·경제를 비롯하여 문학작품의 번역, 관광가이드에 이르기까지 전체 분야에 걸쳐 있으며, 저자들은 학자·전직 외교관·언론인·문인 등이다.

(5) 문화활동

1980년에 설치된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에서는 개원 당시부터 무료 한국어강좌(수강생은 일반인·학생 등 40여 명)를 개설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강연회, 미술전시회, 영화상영, 음악회, 필름·슬라이드·도서의 열람과 대출, 지방순회전시 등 문화활동도 하고 있다.

예술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광복 후부터 김환기(金煥基)·김흥수(金興洙)·남관(南寬) 등 다수의 화가들이 수학하였다. 오늘날도 많은 신진화가들이 수학하며, 개인전도 열고 국제전시회에 참가하기도 한다. 그 중 파리에서 작품활동을 한 대표적인 화가로 이응로(李應魯)를 들 수 있겠고, 미국에서 활약하는 백남준(白南準)이 퐁피두문화센터에서 여러 번 전시회를 가진 바 있다.

음악인으로는 피아니스트 백건우(白健宇),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鄭京和)·강동석(姜東錫) 등이 파리와 유럽무대에서 활약중이며, 미테랑 대통령의 야심적인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된 세계 최대·최신 규모의 바스티유오페라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로 1989년 5월 정명훈(鄭明勳)이 임명되었으며, 1991년 백건우가 황금디아파종상을 수상했다.

한국의 민주화와 국력신장을 배경으로 프랑스에서의 한국어교육·한국연구·한국문화전파 활동은 앞으로 더욱 활발하고, 깊고, 알차게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파리의 한인을 위한 대변지로 한인들이 운영하는 한위클리(Han-Weekly)지가 2000년 4월 20일 현재 156호를 맞고 있다. 1993년에 창간된 교포신문으로 오니바(Oniva)지가 1999년 현재까지 계속 발간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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