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적은 35만 7022㎢이고, 인구는 8085만 4408명(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베를린이다. 인구밀도는 ㎢당 228명이다.
인구의 대부분은 게르만족이고, 유태인 · 슬라브인 · 위그노인 등의 소수민족이 있다. 언어는 고지독일어(高地獨逸語)와 저지독일어(低地獨逸語) 중 일반적으로 고지독일어를 표준어로 삼고 있으며, 16세기에 루터의 성서번역에 의해 신고지독일어(新高地獨逸語)가 확립되어 방언의 차이가 많이 줄었다.
종교는 신교와 구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신교는 주로 북부와 동부에 분포하여 전체 인구의 약 51%가 믿고 있으며, 구교는 주로 남부와 서부에 분포하여 전체 인구의 약 48%가 믿고 있다. 기후는 서유럽의 해양성 기후와 동유럽의 대륙성 기후의 중간형이다.
2015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3조 40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1955달러이며, 우리나라의 대 독일 수출액은 62억 달러로 주종목은 자동차 · 무선전화기 · 선박 등이고, 수입액은 210억 달러로 자동차 · 직접회로반도체 · 자동차부품 등이 주종이다.
독일의 역사는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이후 프랑크족에 의해 여러 부족이 통합되어 프랑크왕국이 건립되는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족통합의 제반 과정을 완결한 칼 대제가 사망한 뒤 동 · 서프랑크로 분열되었으나, 오토 1세에 이르면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여 이후 13세기 전반까지 ‘황제시대’가 계속된다.
그러나 제후의 세력이 커지면서 대공위시대(大公位時代)를 거쳐 다시금 15세기부터는 합스부르크가(家)에 의해 제위가 세습되었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독일사회는 심대한 충격을 받아, 기사전쟁(騎士戰爭) · 농민전쟁 · 종교전쟁 등을 거치면서 1555년에는 아우크스부르크종교화의(Augsburg 宗敎和議)에 의해 신 · 구교가 분리되게 된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종교적 평화는 달성되었으나, 연방체제가 성립됨으로써 독일은 정치적 · 경제적으로 분산화 · 무력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친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유럽지배는 분열된 독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통일운동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빈회의를 거쳐 독일의 민족운동은 독일연방으로 성과를 보았으나, 완전한 통일은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으로 대표되는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뒤 독일은 바이마르공화국과 나치스의 제3제국을 경험하였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함으로써 미국 · 영국 · 프랑스 · 소련의 4개 연합국의 점령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지만 냉전이라는 동서대립의 세계정세 속에서, 1949년에 이르자 미국 · 영국 · 프랑스 관리지역에는 서독이, 소련 관리지역에는 동독이 성립되어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서독은 1949년 5월 23일 통일까지의 잠정헌법으로서 기본법을 제정, 공포하고, 그 해 9월 21일에 국가를 수립하였다.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이며, 의회는 양원제를 취하였다.
사회주의 국가인 동독은 1949년 10월 7일, 인민회의를 열고 독일민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의회는 단원제이며 인민회의가 형식상의 국가최고권력기관이었다.
1969년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설치된 국가평의회는 의회해산 · 총선거실시 · 법령공포 등의 권한을 행사하였다. 내각에 해당하는 각료평의회는 통일전선을 구성하는 5개 정당의 연립정권의 형태를 취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회주의통일당(SED)의 단독정권이었다.
1955년 서독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맹하자, 동독도 같은 해 바르샤바조약기구(WTO)에 가맹하여 ‘두 개의 독일’을 굳히는 길로 나아갔다.
이어 1961년 9월에는 동 · 서독의 긴장관계를 상징하는 베를린 장벽이 동독에 의해 구축되었으나, 1969년 서독에 브란트 정권(Brandt,W. 政權)이 등장하여 이른바 ‘동방정책(Ostpolitik)’의 기치 아래 ‘1민족 2국가’라는 현실정책을 추구하면서 화해의 길로 들어섰다.
1970년 동 · 서독은 관계정상화를 위한 기본조약에 조인하여 현 국경선을 상호 승인할 것을 약속하였으며, 1974년 6월에는 동 · 서독이 함께 국제연합에 가입하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동서냉전체제의 해빙과 구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힘입어 독일민족은 재빨리 통일을 성취하였다. 1990년 3월 18일 구 동독 인민의회의 결정으로 동독지역이 1990년 10월 3일에 흡수통합되어 독일연방공화국으로 통합되었다. 이로써 독일은 16개 주로 구성된 연방국가가 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은 1949년 5월 23일에 제정된 기본법(Grundgesetz)에 기초하여 입법 · 행정 · 사법의 삼권분립으로 법치주의에 의한 자유주위적 사회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연방대통령을 둔 내각책임제인데, 대통령은 연방대통령선출 특별위원회에서 5년 임기로 선출한다. 이 위원회는 연방위원과 주(州)의 국민대표 동수로 구성된다.
연방수상은 연방의회에서 선출되며, 자신의 책임 아래 각 부처 장관을 제청하고 정책을 수행하여 나간다. 사법부는 연방제의 특성에 맞도록 각 주의 법원제도를 갖추어, 5개 연방차원의 법원, 즉 연방대법원 · 연방행정법원 · 연방재정법원 · 연방사회법원 · 연방노동법원 등이 있다.
연방헌법재판소(Bundes Verfassungsgericht)는 모든 헌법기관에서 독립적인 최고의 법원으로 헌법의 수호자 역할을 하고 있다.
1998년 9월 27일, 이제까지 연립정부를 이루던 기민당(CDU/CSU)과 자민당(FDP)이 총선거에서 패배하여 16년간 집권해 온 ‘통일수상’ 콜(Helmut Kohl)이 물러나고 사민당(SPD)의 슈뢰더(Gerhard Schröder)가 새 수상이 되어, 통일 이후의 실업문제와 사회연대, 환경 및 조세정책을 새롭게 실천하고 있다. 통일 이후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 · 경제적 힘을 발휘하고 있는 주도적 국가이다.
(1) 분단 이전의 독일과 우리나라
독일과 한국의 첫 접촉은 고려시대의 염제신(廉悌臣)이 1354년 원나라 조정에서 프랑크제국의 사신과 만난 일에서 시작된다.
문헌상으로 독일이 처음 알려진 것은 1614년(광해군 6)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였는데, 이수광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독일인국(獨逸人國)은 백옥(白玉)으로 성을 쌓는 나라이다”라는 짧은 기록에서였다.
30여년 뒤 병자호란 때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독일인 신부인 샬(Schall von Bell,J.A., 湯若望)과 교분을 맺었으나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양국은 별다른 교섭이 없이 지내왔다.
1832년(순조 32) 영국 상선 암허스트호에 승선한 독일인 목사 귀츨라프(Gutzlaff,K.F.A.)가 충청도 해안에서 선교를 시도하였지만 조선관리의 완강한 거부로 되돌아갔다. 당시, 조선은 기독교 금압정책과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었고, 반면에 독일의 프로이센제국은 1860년대에 들어와 극동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집정하고 있던 1866년(고종 3)에 중국 · 일본을 드나들던 독일상인 오페르트(Oppert,E.J.)는 영국상선 로나호에 승선, 내한하여 통상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뒤, 그 해 다시 엠페러호로 재입국하였으며, 1868년에는 차이나호로 세 번째 입국하여 아산만의 남연군묘 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을 일으켜, 당시 실권자인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불을 붙이는 계기만 만들었다.
또한, 1870년에는 주일 독일대리공사였던 브란트(Brandt,M.A.S.von)가 최초로 국가적 차원에서 의도적인 입국교섭을 시도하였다. 브란트는 1870년 5월 3일 독일 군함 헤르타호에 탑승, 부산에 입항하여 대한(對韓)통상교섭을 시도하였으나 거절되자, 공포로 위협사격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 당시 조선 정부는 대원군 섭정 아래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일환으로 병인사옥을 일으키고, 병인양요 · 신미양요 등 프랑스 및 미국과의 척양(斥洋)의 무력항쟁에 승리하여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는 등, 쇄국정책을 강화시키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일본을 비롯, 서구 어느 나라와도 문호개방을 시도하거나 허락하지 않을 형편이었다.
1873년 대원군이 하야하고 민씨 척족이 실권을 잡았으나, 1876년 병자수호조약으로 일본과의 개국통상이 이루어지고, 이어 정부의 개화의지가 표출되면서, 독일의 대한교섭도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특히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약칭 조미조약)이 청나라의 알선으로 체결됨을 계기로 한독관계도 이에 선도되어 급진전을 보게 되었다.
독일은 조미수교가 이루어지기 1개월 전에 공사 브란트를 대한교섭의 전권대신으로 임명하고 빌헬름 1세(WilhelmⅠ)의 교섭친서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를 검토한 조선 정부는 독일과의 수교의사를 비치기는 하였으나, 양 당사국간의 직접교섭을 보류하고 청나라의 참여하에 협의할 것을 요청하였다.
1882년 5월과 6월에 각각 조미조약과 조영조약이 체결되자, 사태의 진전을 주시하고 있던 브란트는 북경에서 외교교섭을 벌여 청나라의 알선을 확약받고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전권대신 조영하(趙寧夏)와 부관 김홍집(金弘集)을 보내 월미도에 정박중이던 독일 함상에서 독일 전권공사 브란트를 만나고 교섭을 시작하였다.
사흘 동안의 교섭 끝에 1882년 6월 30일 14개 조로 구성된 조독수호조약이 체결되어 양국 전권대사인 조영하와 브란트가 각각 서명하고 수교하였다. 그러나 문구가 애매하고 치외법권이 철폐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독일측이 이 조약의 비준을 거부하여, 이듬해 재일 요코하마주재 총영사 차페(Zappe,E.)가 서울에 와서 새 조약을 교섭하였다.
이번에는 조선 측이 중국의 알선을 배제하고 직접 협상에 임하여 1883년 11월 26일 수정, 체결된 조약이 비준, 교환되었다. 이것이 조독수호조약 13관(款)과 선후속약(善後續約)으로, 당시 양국 전권대사인 민영목(閔泳穆)과 차페 사이에 조인, 체결된 것이며, 완전한 조독수호조약이었다.
조독조약이 조인된 1883년에는 이미 적지 않은 독일인들이 조선에서 정치 · 무역 · 교육 · 산업 · 문화 영역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었다. 그 중 묄렌도르프(Mӧllendorff,P.G.von)는 조선 정부에 고용된 정치인사로서, 그를 통하여 주한독일인 세력이 크게 신장되고 있었다.
그는 1882년 12월에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의 추천으로 조선 정부의 해관(海關) 및 외교고문으로 부임하여 조선의 문물개화를 위하여 다방면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조러밀약설의 책임을 지고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 해관총세무사(海關總稅務司)직을 내놓고, 1885년 12월 5일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1884년 4월에는 볼터(Wolter,K.)를 책임자로 하여 인천에서 독일무역상사 세창양행(世昌洋行)이 설립되었다. 이 무역상사는 독일의 물품을 수입하여 조선에 판매하였고, 1885년 11월에는 조선 정부에 은화 10만 냥을 차관해 주었다.
1884년 6월 4일에는 조독조약에 따라 주한독일부영사 부들러(Budler,H.)가 먼저 내한하였고, 이어 10월 14일에는 총영사 젬브쉬(Zembsch,O.)가 도착하였다. 그러나 주한 독일외교관은 끝까지 판리공사(辦理公使)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조선은 1880년대 초반에 서양국가들과 조약을 체결하였지만, 청 · 일 · 러 3대국 사이에서 국내외 정치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고, 각국 외교관들은 이권획득을 목적으로 음모와 술책을 사용하여 조선 왕실에 접근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으면서도 경제적 무역통상, 광산채굴을 통해 조독관계를 밀착시키고 있던 독일은 우선 조선이 세계 열강과 인접 강대국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의도에서 독일 측이 조선정부에 대하여 중립국안(中立國案)을 권고한 것은 역사적으로 흥미 있는 일이었다. 1885년 3월 16일 부들러는 외무협판(外務協辦) 김윤식(金允植)에게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영세중립선언을 할 것을 권고하였다.
부들러는 외국 외교관들과도 접촉하였으나 독일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처지는 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정부는 이 권고안을 묵살하였다. 한편, 독일에서는 처음으로 함부르크에서 마이어(Meyer,E.)가 조선 정부의 허가로 명예영사로 지내다가 1901년에 한국영사관이 설치되어 초대 공사로 민철훈(閔哲勳)이 부임하였다.
조독조약을 통해 우리 나라에 있어서 독일문화권은 상당히 폭넓게 확산되어 갔다. 일본 측의 악선전과 청나라의 오해로 중국으로 되돌아갔던 묄렌도르프는 1888년 5월 다시금 조선을 찾았으나, 브란트와 1887년부터 1898년까지 총영사를 지낸 크리엔(Krien,F.)의 방해로 다시 돌아갔다.
그렇지만 조선에서 그의 도움을 받았던 독일인들의 활동이 계속 전개되어, 1896년 4월에는 세창양행 대표인 볼터가 금성 · 당현의 광산채굴권을 조선 정부로부터 허가받았다. 1898년 9월에는 관립덕어학교(官立德語學校)가 설립되어 볼야안(Bolljahn,J.)이 교사로 초빙되었다.
이러한 조독관계의 결속을 확인하기 위해 1898년 7월에는 프로이센제국 빌헬름 2세(Wilhelm Ⅱ)의 친동생 하인리히 친왕(Prinz Heinrich)이 조선을 방문하였다. 한말의 외교사 가운데 가장 큰 국빈이었던 하인리히 친왕은 고종을 예방하고 금성탄광과 관립덕어학교를 방문하였다.
1901년 2월 27일부터는 독일해군 군악대장 에케르트(Eckert,F.)가 조선 왕실 악대장으로 초빙되어 활동하면서, 같은 해 9월 고종황제 50세탄신축연에서 대한제국 국가(國歌)를 작곡하여 연주하기도 하였다.
또한, 궁내부(宮內府)에서 시중을 들면서 서울 정동에 이른바 ‘손탁호텔’을 경영한 손탁(Sontag,A.)과 고종의 시의(侍醫)로 근무한 분쉬(Wunsch,R.)도 기억될 만한 인물이며, 1909년부터 조선에 진출하여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베네딕트수도원 선교사들도 한독관계에 일익을 담당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처럼 조독조약 체결 후 활발해졌던 한독관계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됨에 따라, 1906년 다른 외국 공관과 함께 독일공사관이 철수함으로써 단절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이 직접 독일과 공식적으로 접촉할 수는 없었으나 비공식적인 관계는 계속되었다. 영친왕이 1927년 유럽 여행길에 원수 힌덴부르크(Hindenburg)를 방문하였고,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우승했으며, 적지 않은 유학생들이 독일에 유학하였다.
그 중에는 독일에 계속 남아 우리 나라 문화를 소개하고, 대표작으로 <압록강은 흐른다 Der Yalu fließt>를 남겨 한국인의 우수성을 과시한 이미륵[李儀景]과 같은 지식인도 있다.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종결되자, 한국은 광복과 함께 독립의 부푼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미 · 소 냉전정치의 희생물로서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며, 독일은 패전과 함께 열강들의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미 · 영 · 불 · 소의 분할점령상태에 놓였다.
1948년에 남북한이 차례로 정부를 수립하였고, 1949년에는 서독과 동독이 각각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을 선포함으로써, 한국과 독일은 전형적인 국제정치형 분단국가가 되었다. 따라서 한독관계 또한 분단국가가 갖는 국제정치적 조건과 제약 속에서 전개되지 않을 수 없었다.
(2) 서독과 우리나라
분단상황 아래에서 한반도는 6·25전쟁을 치르면서, 1953년 이후에는 전후 복구에 여념이 없어 정상적인 한독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서독은 1955년 파리협정으로 완전히 주권을 회복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 및 서구연합(WEU)에 가입함으로써, 전쟁 없는 상태에서 급속도의 경제발전을 추진할 수 있었다.
한국과 독일이 서로 국가승인을 하고 양국간에 외교관계가 다시 수립된 것은 1955년 12월 1일이었다. 이보다 앞서 1954년 10월 1일에 독일 레마겐(Remagen)에 한국 총영사관이 설치되었으나 독일 정부는 그것을 한국무역대표부로 인정하였으므로, 양국간 정식 외교관계는 1955년에야 비로소 재개되었던 것이다.
우리 정부는 1956년 8월 총영사관을 쾰른(Kӧln)으로 옮겼으며, 독일 정부는 그 해 10월 서울에 독일총영사관을 개설하였다. 양국은 1957년 3월 5일 총영사관을 각각 공사관으로 승격시켰으며, 한국은 9월 당시 독일의 수도인 본(Bonn)으로 공사관을 옮겼다. 이어 1958년 8월의 공동성명으로 양국은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켰다.
같은 해 8월 22일 대한민국 주독 초대 대사로 손원일(孫元一)이 부임하였으며, 같은 해 상공부장관 김일환(金一煥)이 독일을 방문하여 경제관계를 논의하였다. 그결과, 같은 해 10월 경제상 에르하르트(Erhard,L.)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경제 재건에 관한 약속을 하였다.
제2공화국을 거쳐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뒤, 특사 김용식(金溶植)이 독일을 방문하여 우리 나라의 상황을 설명하고 계속적 결속을 확인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상공부장관 정내혁(丁來赫)이 독일을 방문, 한국경제 및 기술협조에 관한 협정서에 조인하여 1억 5,000만 마르크의 장기 재정차관을 받았다. 또한, 서독 정부는 우리 나라의 간호사와 광부를 받아들일 것을 협정하여, 1962년 1월 우리 나라의 광부가 독일에 파견된 바 있다.
1964년 1월 특사 김현철(金顯哲)이 독일을 방문하여 한독관계의 결속을 확인하였고, 같은 해 5월 하원의장 게르스텐마이어(Gerstenmeier,E.)가 내한하였다. 이어 8월에는 상공부장관 박충훈(朴忠勳)을 단장으로 하는 한국경제사절단이 독일을 방문하여 ‘한독경제회담에 관한 의정서’ · ‘한독재정원조에 관한 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이상의 경제협력을 통한 한독관계는 1964년에 절정을 이루어 서독 대통령 뤼브케(Lübke)가 한국의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를 초청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통령 일행은 12월 7일부터 1주일간 독일에 머물면서 정상회담을 가지고, 또한 재독 한국교민을 격려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방문 이후 양국간의 교역 및 서독의 대한투자는 급증하게 되었으며, 1966년 3월에는 경제성차관 랑케(Ranke)가 우리 나라를 방문, 상공부장관 박충훈과 제1차 한독경제각료회담을 개최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장기영(張基榮)이 독일을 방문하여 경제협력성장관 쉘(Scheel,W.)과 제2차 경제각료회담을 개최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 29일에는 ‘한독기술협력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여 서독의 대한투자를 용이하게 하였다.
이어 1967년 3월 2일부터 6일까지 대통령 뤼브케가 우리 나라를 방문, 한독외교가 맺은 친선을 과시한 바도 있다. 그러나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는 이른바 동베를린 거점 북한대남공작단사건을 발표, 국내외 교수와 학생 · 예술인 등 315명이 관련되었다고 밝혔다.
이 사건처리를 둘러싸고 우리 나라 정부의 안보우선주의와 독일 정부의 인권문제 중시의 태도가 대립되어 상당한 긴장을 야기시켰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의 대한인식(對韓認識)이 악화되어 우리의 대유럽 외교, 특히 대독 경제외교가 일시적으로 중대한 시련에 봉착하였다.
1969년 1월에는 동베를린사건을 둘러싼 양국관계를 협의하기 위해 서독대통령의 특사로 외무차관 프랑크(Frank,P.)를 단장으로 한 특별사절단이 방한하였다. 그렇지만 양국간의 태도나 의견의 폭은 좁혀지지 않아, 그 뒤 서독은 정경분리원칙에 입각하여 우리 나라의 정치정세에 냉담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1970년 2월에는 통일원장관 신태환(申泰煥)이 독일을 방문, 동서독 분단상과 통일노력을 시찰하였고, 같은 해 5월에는 외무상 쉘이 우리 나라를 방문하여 한독문화협정과 ‘부산직업학교 설립에 관한 약정서’에 서명하였다. 1972년 11월에는 ‘한독비자면제협정’과 ‘한독재정원조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 3500만 마르크를 차관하였다.
양국간 경제기술협력 현황을 살펴보면, 1959년부터 1982년까지 우리나라 정부는 7억 9,621만 5,000달러의 차관을 도입했으며, 2,405만 6,000달러의 합작투자와 10만 7,000달러의 기술도입 건수를 나타내었다. 1984년 12월 현재의 차관은 더욱 증가하여, 공공차관 2억 7,300만 달러, 상업차관 6억 600만 달러에 달하였다.
한편, 우리나라는 서독에 섬유류 · 선박 · 혁제품 · 전기부품 등을 수출하였고, 기계류 · 유기화합물 등을 수입하였다. 1984년도 대서독 수출액은 9억 2,400만 달러, 수입액은 7억 9,400만 달러였으며, 1988년에는 각각 23억 6,780만 달러와 20억 7,399만 달러로 증가하였다.
1995년 1월 말의 재독 한국교민은 1만 7,494명으로 직업별로는 전문직종사자 · 기술자 · 학생 · 상업종사자 등의 순서였다. 한독간의 친선단체로는 한독의원협회와 한독협회가 있으며, 그 밖에 한독민간경제협력위원회, 한독법률학회, 한독경상학회 등이 창립되어 활동하고 있다.
더욱이 1983년은 한독수교100주년이 되는 해로서, 양국에서는 다양한 기념행사가 개최되었고, 쉘(Scheel,W.) 대통령의 방한과 함께 친선사절단도 교환되었다.
1980년대 후반으로 들어오면서 한독관계는 중요한 무역상대국으로 더욱 긴밀해져 갔다. 1997년 당시 144억 마르크에 이르는 총 교역량은 지난 10년간 2배 이상의 증가를 보여 준다. 독일과 한국의 상대국에 대한 자본투자도 늘어갔다. 독일은 현재 대한 투자 제1위의 유럽국가이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동서독의 분단선이 개방된 뒤 대통령 노태우(盧泰愚)가 서독을 방문하였고, 1991년에는 폰 바이체커(Von Weizsäcker,R.) 대통령이 방한하였다.
또 1993년에는 헬무트 콜(Helmut Kohl) 연방수상이 방한하였고, 1995년 3월에는 대통령 김영삼(金泳三)이 방독하였다. 1997년 10월에는 킨켈(Kinkel,K.) 연방외무장관이, 1998년 2월에는 바이겔(Waigel,T) 연방재무장관이 방한하였으며, 1998년 9월에는 헤르초크(Roman Herzog) 연방대통령이 방한하였다.
한편, 한독간의 개발협력의 차원에서 보면 진행되는 것과 종료되는 것이 엇갈리고 있다. 1962년부터 독일은 한국의 개발사업에 참여하여 총 13억 마르크를 제공하였다.
한국의 개발수준과 함께 1982년도에 재정적인 협력관계는 종료되었다. 1989년부터는 기술협력에 있어서도 새 사업은 승인되지 않았으며, 1990년도 중반에 모든 기술협력이 종료되었다.
한독협력사업의 성공사례인 부산 소재 한독경영정보여자고등학교는 1965년에 독일의 가톨릭원조기관인 미제레오(MIZEREO)의 기금으로 설립되었다. 지금은 한국 측에서 경영하는 이 학교에서 3,000명에 이르는 여학생이 양재 · 디자인 · 호텔조리 · 병원급식 등 실업교육을 받아왔다.
한독간의 문화관계는 1972년에 체결된 한독문화협정에 기초한다. 학술 · 영화 · 음악 · 문학 · 미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확대되어 왔다. 현재 독일에는 2,300여 명에 이르는 한국인이 살고 있고, 5,000명에 이르는 한국유학생이 독일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각 지역의 재독한인회, 본(Bonn)의 독한협회(Deutsch-Koreanische Gesellschaft), 서울의 한독협회, 주한 독일문화원(Goethe-Institut)과 각종 학회 및 친목회, 동창회들이 한독문화교류를 활성화해 나가고 있다.
서독은 북한과는 공식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정경분리정책을 적용하여 자유무역 형식에 의한 민간상사의 거래를 허용하고 있었다. 무역은 주로 현금결재의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상업차관에 의한 합섬사 · 마그네사이트 · 제련공장 · 통신기재 · 비료공장 등 플랜트 수출이 있으며, 재정차관은 해주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적극적인 대서독 접근책으로 인하여, 1978년에는 북한 무역공사 요원 11명이 독일을 방문하였으며, 1979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주재 국제학생연맹사무국 북한위원인 강현덕이 독일사회주의 노동청년회에 참석하였고, 1980년에는 북한 금강은행 총재 최유석이 대독 부채상환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독일을 방문한 바 있다.
한편, 북한의 대 서독 수출입 현황을 살펴보면, 1973년에 수출 1500만 달러, 수입 3천8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였으며, 1988년에 와서도 수출 1억350만 달러, 수입 1억2330만 달러로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북한의 주요 수출품은 각종 석재 및 토사류 · 납 · 아연 · 모피 · 구리, 기타 반(半)제품, 정밀광학제품 · 철판 등이며, 주요 수입품으로는 전기제품 · 자동차 · 기계류 · 화학제품 등이다.
(3) 동독과 우리나라
동독과 우리 나라 사이에는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없었다. 국제역학관계 속에서 전형적인 분단국가가 된 뒤 동독과 우리 나라 사이에는 서로가 외교 상대자로서 교섭할 수 있는 여건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비공식적이거나 국가적 차원이 아닌 수준에서만 교류가 행해져 왔을 따름이다.
1979년 9월 10일부터 소포우편물 교환을 개시하였고, 1977년 6월 인도네시아주재 동독대사관 주최의 건국기념 리셉션에 우리 나라 대사가 최초로 초대받아 참석하였다.
동독 당국은 1985년 6월 동베를린의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 참석할 한국대표단의 편의를 위하여 서베를린주재 한국총영사관 직원 3명에게 입국사증을 발급하였다.
같은 해 6월 5일에는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노태우(盧泰愚)가 동독 체육장관인 에발트와 만나서 단독회담을 가졌다. 체육교류는 동독파견이 4회이며, 서울초청이 2회이다.
파견은 국제복싱연맹총회(1981) · 세계여자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1983) · 동독체육시설시찰(1983) · 동독비교체육연구프로그램참가(1983)이며, 초청은 국제복싱연맹부회장(1983) · 세계피겨스케이팅선수권대회입상우수선수초청시범경기(1985) 등이 있다.
제24회 서울올림픽경기대회에는 372명의 동독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현재 동독은 1949년 11월 이래 1990년 10월 통독 이전까지 북한과 단독수교 상태였으며, 북한은 1954년 3월 공관을 설치하였다. 또한, 1984년 5월 29일부터 6월 2일까지 김일성이 동독을 방문한 바 있다.
(1) 문화사적 관계
우리 문화가 독일에 알려지고 독일문화 속에 자리한 과정은 그 특징적 성격에 따라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진다.
첫째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후반에 이르는 예비시기, 둘째 19세기 후반에서 1910년까지의 소개시기, 셋째 일제강점기의 준비시기, 넷째 광복 이후의 정착 · 발전시기가 그것이다.
그 전체적 흐름을 보면 17세기 후반부터 200년 동안 한국문화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이 독일에 알려지다가, 1883년 한독수호통상조약의 체결 이후 교역과 더불어 한국문화를 올바르게 소개하려는 노력이 독일인들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그러한 노력이 몇몇 학자들에 의하여 전문화되었다. 분단의 아픔을 비슷한 때에 겪은 두 나라는 이제 대한민국과 서독 사이에서 외교관계를 재개하고 왕성한 문화교류 · 교역 등을 가져 독일 내 한국문화는 한층 확대, 정착되어 가고 있다.
한국사회와 문화가 단편적으로나마 독일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후반 마르티니(Martini,M.)와 하멜(Hamel,M.)의 글에 의해서이다. 남부 티롤 출신의 예수회 신부인 마르티니는 17세기 중엽 중국에 다녀간 다음, 1653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동아시아지도책을 네덜란드어로 출판하였다. 그 책의 독일어 번역판이 1655년 빈에서 출판되었다.
그는 우리 나라에 다녀간 일은 없으나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중국인과 한국인이 쓴 한국에 관한 글을 읽고 그것을 정리하여 ≪한반도와 그 경치 · 도시 · 관습 및 식물에 관한 마르티니의 보고서 Martini Martins Bericht von der Halbinsel Korea, ihren Landschaften, Städten, Sitten und Gewächsen≫를 남겼다.
그에 이어 1668년 네덜란드어로 출판된 하멜의 표류기가 1672년 독일어로 번역되었는데, 그것은 단행본으로는 나오지 못하고 마르티니의 글 및 동아시아에 관한 다른 보고서와 함께 아르놀트(Arnold,C.)가 편집한 ≪세 강대왕국 일본 · 샴 · 한국에 대한 서술 Beschreibung dreier mächtiger Kӧnigsreiche, Japan, Siam und Corea≫에 포함되었다.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의 글은 일본이 독일에 알려지기 20년 전에 우리 나라를 독일에 알리는 선구자의 구실을 하였다.
이들 글이 하나는 선원의 표류기이고 다른 하나는 간접자료에 의한 것임에 비하여 독일인인 지볼트(Siebold,K.T.E.von)의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는 의사이자 학자로서 일본에 7년간 머무르며 학교를 세워 서양학문을 가르쳤다. 우리 나라에 다녀간 적은 없으나, 일본에 표류해 온 한국인을 직접 만나 한글 자모를 배우는 등 한국에 관한 보다 학술적인 조사를 수행하였다.
네덜란드에 돌아가서 그는 1831년 라이덴에서 ≪일본기 Nippon;Archiv zur Beschreibung von Japan≫를 독일어로 출판하였고, 그것은 1887년 뉘른베르크에서 증보판으로 나왔다.
두 권으로 된 이 책의 다섯째 장에는 한국의 관료제도 · 역사 · 문화 · 언어 등이 비교적 객관적으로 다루어져 있다. 그 뒤 20세기 중엽까지 한국에 관한 단행본을 쓴 저자들은 지볼트의 글을 거의 예외없이 하나의 기본자료로 이용했다.
한독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 더불어 우리 나라는 종래의 폐쇄적 태도를 벗어나 여러 분야에 걸쳐 독일과 공식적 · 공개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이에 따라 1910년까지의 소개시기에는 한국문화가 독일에 적극적으로 소개되는가 하면 독일인에 의한 본격적 여행기들이 쓰여지기도 했다. 이 시기의 중심인물과 회사는 마이어(Meyer,E.)와 세창양행이다.
마이어는 함부르크 출생의 상인으로 1881년 홍콩에 마이어상사(Meyer商社, 중국명 咪曮洋行)를 설립하고 1884년에는 제물포에 그 지사인 세창양행을 설치하여 볼터(Wolter,C.)를 지사장으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그는 1886년 3월 초대 주독조선총영사(駐獨朝鮮總領事)로 임명되었다.
마이어는 이제 상업적 관심에서만이 아니라 조선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 한국문화의 소개를 위하여 진지하고도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으니, 세창양행을 통하여 수집한 한국물품을 1889년 함부르크산업박람회에 전시하였다.
그는 또한 풍부한 한국 수장품을 가지고 1894년 겨울 함부르크미술공예박물관에서 한국전시회를 개최하였는데, 한국의 문화 · 미술 · 자연산물 등이 그 주요 전시분야를 이루었다.
마이어의 이와 같은 한국문화 소개의 노력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더욱 확대되거나 계승되지 못하였으나, 유럽에서 소장물품을 통한 최초의 구체적이고도 공식적인 소개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한편, 우리 나라와 독일 사이에 외교관계가 맺어짐에 따라 독일인 여행가 · 기자들의 방문과 함께 그 여행보고가 출판되어 한국사회와 문화가 독일에 많이 소개되었다.
1895년 헤세-바르테크(Hesse-Wartegg,E.von.)는 서울에 관한 최초의 상세한 여행기인 ≪코리아 Korea≫를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에서 출판하였다.
1901년 세창양행 지사장인 볼터는 <한국의 옛날과 지금 Korea, einst und jetzt>이라는 논문을, 독일 ≪쾰른신문≫의 특파원 겐테(Genthe,S.)는 세창양행 소유의 강원도 금성 당고개의 금광을 둘러보고 그 기사를 썼다.
그에 앞서 1899년 하인리히친왕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의 방문기가 ≪함부르크 코레스폰덴트 Hamburgischer Korrespondent≫ 신문에 두 번에 걸쳐 게재된 바 있다.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은 동아시아에서의 유럽열강의 이해관계 때문에 유럽인들의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에 따라 우리 나라를 다녀간 이들이 쓴 한국을 소개한 책자가 독일어로 두 권 출판되었다.
차벨(Zabel,R.)은 1906년에 펴낸 ≪러일전쟁 동안 한국에서 보낸 나의 신혼여행 Meine Hochzeitsreise durch Korea während des Russisch―Japanischen Krieges≫에서 러일전쟁과 그것이 한국에 끼친 영향을 상세히 서술하였다. 폴란드인 지에로스체브스키(Sieroszewski,W.)는 그 해 ≪한국 Korea≫이라는 여행기를 베를린에서 출판하였다.
이 밖에 대한제국의 궁궐에 근무하며 궁중생활의 모습을 그려낸 크뢰벨(Kroebel,E.)의 1909년 베를린판 ≪나는 어떻게 한국 황실에 왔나 Wie ich an den Koreanischen Kaiserhof kam≫라는 책이 있다.
이들에 의한 한국사회 및 문화의 소개는 체계적이거나 객관적이지 못하고 다분히 유럽 중심적 편견에 의한 여행기의 성격을 띠지만 그때까지 은둔의 나라로 알려진 한국을 독일인에게 소개한 공적이 적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독일인들에 의한 한국문화의 소개 내지 연구는 앞 시기의 관심을 바탕으로 전문화되었다. 분도회의 총원장이었던 베버(Weber,N.)는 1915년에 출판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Im Lande Morgenstille≫라는 책에서 한국과 한국교회를 아름답게 소개하였다.
1908∼1929년 사이에 분도회의 선교사로 한국에서 일을 한 에카르트(Eckardt,A.)신부는 귀국하여 브라운슈바이크대학교에서 1931년 <한국의 학교제도 Das Schulwesen in Korea>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미 1923년에 ≪한국어문법 Koreanische Konversationsgrammatik≫, 1929년에 ≪한국미술사 Geschichte der Koreanischen Kunst≫, 1930년에 ≪한국의 음악 Koreanische Musik≫을 출판하였고, 또한 뮌헨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쳤으니, 독일에서의 한국학의 출발이 그로부터 비롯하였다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한, 라우텐자흐(Lautensach,H.)는 브라운슈바이크대학교의 교수로서 1933년 한국의 지형을 연구하고 돌아가 한국의 지리 및 한국인의 생활과 문화에 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1945년에는 ≪한국 Korea≫이라는 명저를 내었다.
한편, 독일은 당시 비자의 취득 없이도 유학이 가능하였기에 김중세(金重世) · 이의경(李儀景:미륵) · 도유호(都宥浩) · 안호상(安浩相) · 김재원(金載元) 등 수많은 학생들이 유학하였다.
이들은 대개 자연과학 · 철학 · 예술 등을 전공하였기에 한국문화나 역사를 연구 내지 소개하지는 못하였으나, 유학기간 동안 생활 속에서 한국문화의 특징적인 면을 독일사회에 보여주었음은 충분히 짐작된다.
이들 가운데 이의경의 경우는 특기할 만하다. 그는 1920년 독일에 가서 1928년 뮌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는 이내 문필활동에 종사하여 한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1946년에 출판된 그의 대표작이자 자전소설인 <압록강은 흐른다 Der Yalu fließt>는 전후 독일문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이거니와, 그 이전에도 그는 <어느 한국 골목의 저녁> · <열녀문> · <놀부와 흥부> · <주인과 하인> 등을 썼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도 <유령 · 동물 · 계모 이야기> · <바둑놀이 및 그밖의 한국전설> · <미륵불> 등의 많은 이야기를 독일에 소개하였다. 문필생활 이외에도 그는 만년에 뮌헨대학교에서 한학(漢學)과 한국문학을 강의하여 바우어(Bauer) 같은 유수한 동양학자들을 육성하기도 하였다.
그는 한독관계사의 어두운 시기에 독일에서 문학을 통하여 한국문화를 소개하고 또한 교육면에서는 한국학의 씨앗을 뿌린 귀중한 인물이었다.
광복 이후 1950년대에 들어와 한국과 서독 사이의 외교관계가 재개되면서 한국문화는 서독 안에 정착되고 발전하는 시기를 맞는다. 이 시기에는 무엇보다 한국사람들이 대거 독일로 진출한 것이 특징이다.
광부 및 간호사의 취업, 유학생의 급증, 수출상사의 진출 등으로 1981년 말에는 거의 2만 명의 한국인들이 서독에 살며 하나의 소수민족문화를 과시하는 정도가 되었다. 여기에다 주한미군과 결혼했다가 뒷날 남편의 서독 전보로 그곳에 간 한국여성이 1981년 말 1,200명을 넘었다.
많은 수의 한국인들이 서독에 거주하면서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동안 이들이 심어놓은 서독 안의 한국문화는 크게 두 가지 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한국의 생활문화가 소수민족문화로서 서독사회와 문화에 정착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수 한국인의 문화활동이 서독의 문화에 기여한 것이다.
후자의 예로는 윤이상(尹伊桑)이 한국의 음악세계를 바탕으로 오페라 <나비의 춤>을 작곡한 것이라든지, 축구선구 차범근(車範根, 차붐)이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함으로써 한국을 크게 알리고 한국인의 자긍심을 올려준 일, 바둑전문기사 이창세(李昌世)에 의한 한국 바둑문화의 보급, 태권도 사범들에 의한 태권도 보급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에 비하면 전자의 활동은 훨씬 다양하고 직접적이며 생활적이다. 이들은 직장과 연구 · 사업기관에서 직접 서독사람과 접촉하면서 생활 속에서 그들에게 한국인과 그 문화를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한국문화를 독일 안에 정착,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한국간호사들은 한국여성이 가진 성실 · 겸손 · 지혜 · 따뜻함 등의 미덕을 발휘하여 병원에서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인기를 얻었다. 한국광부들의 부지런하고 성실한 면도 많이 알려졌다.
한국인들은 또한 일터에서 벗어나 놀 때에 한국인 · 서독인을 가리지 않고 두루 한데 모여 푸짐한 음식을 차리고 번갈아 노래하며 즐겁게 놀아 그 특징적인 놀이문화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곳곳에 차려진 한국음식점과 식품점을 통하여 김치를 비롯한 전통한국음식을 독일식 생활문화에 뿌리내리기도 하였다.
한편, 정부기관을 통한 홍보와 다양한 문화교류활동에 의한 한국문화의 소개, 그리고 학술적인 연구, 출판에 의한 한국이해의 심화 등이 지속되어 왔다.
물론, 그 사이 이른바 ‘동베를린사건’으로 인하여 한국인에 대한 인상이 한때 좋지 못하기도 하였고, 개별 한국인이 저지른 불미스러운 행동도 없지 않았다.
1990년 동독과 서독이 통일된 뒤 지금의 한국인은 독일의 한 소수민족으로서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고 한국문화를 더욱 정착,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2) 한국유물
독일은 유럽의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역사적으로 지방분권이 발전하여 온 곳이다. 따라서 각 주와 도시 · 마을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있다.
19세기 말 이래 한국과의 다양한 관계로 한국에 다녀간 독일인들이 많으므로, 이들이 수집한 한국문화에 관한 유물이 적지 않다. 이들은 대개 구입이나 기증의 방법을 통하여 대부분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한국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은 1990년 통독 이후에는 70개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가운데 100년의 역사가 넘는 베를린 · 드레스덴 ·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을 비롯하여, 브레멘 해외박물관, 쾰른 동아시아박물관, 함부르크 미술공예박물관 등이 있다.
그리고, 대도시의 박물관 · 미술관은 비교적 많은 한국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함부르크는 무역항으로서 외국과의 교역이 가장 왕성했던 곳이고, 세창양행의 사장이자 주독조선총영사인 마이어의 고향 및 활동처였기에 한국유물이 가장 많이 수집되었다.
함부르크민족학(인류학)박물관이 그 대표적인 곳으로, 이 박물관의 동양학부에 대략 3,000점이 넘는 한국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민족학박물관은 원래 각 민족의 생활문화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여 왔으므로, 한국유물도 복식 · 종교의례품 · 놀이기구 · 악기 · 부엌용구 · 수공업제품 · 도자기 · 종이류 · 잡화 · 서화 · 책 · 사진 · 지도 등이 있다. 이 중에 기산풍속도(箕山風俗圖) 79점과 허련(許鍊)의 8폭병풍은 주목할 만하다.
전자는 19세기 말의 풍속화가 김준근(金俊根)이 한국인의 문화와 생활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그 병풍과 함께 주로 마이어에 의하여 수집되어 이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이들 그림을 비롯하여 그 밖의 서화는 1980∼1981년 사이 한국에서 초빙되어 간 표구사 김용복(金容福) · 김남두(金南斗)에 의하여 표구처리되었다. 이는 동아시아의 표구문화가 한국인에 의하여 유럽에 최초로 상륙한 예가 된다.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의 민족학박물관은 한국유물수집의 꽤 긴 역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까지는 동독에 자리하여 그 유물의 수나 내용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동베를린의 미술공예박물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에 비하여 서베를린의 여러 박물관에는 다양한 한국유물이 그 특성에 따라 수집, 전시되고 있다.
그 가운데 동아시아미술박물관에는 도자기 · 서화 등의 유물이 있고, 민족학박물관에도 인쇄와 생활문화를 주로 한 다량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미술공예박물관도 도자기를 비롯하여 약간의 한국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한편, 한국미술공예 관계의 유물소장으로 함부르크의 미술공예박물관과 쾰른의 동아시아미술박물관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두 박물관은 1984년 한독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미술5천년’ 전시회를 가졌던 만큼 이 방면에 이름이 높다.
전자는 특히 19세기 말 마이어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한국전시회를 열었던 곳으로서, 수량은 많지 않으나 도자기류 · 서화 · 공예품을 소장하고 있다.
후자는 1980년대 서독 내에서 동아시아미술관계로는 가장 전문적이고 활동적인 박물관이다. 중국 · 일본에 비하여 한국유물의 수는 크게 떨어지나 고서화와 불상 등의 유물이 있고, 무엇보다 한국 국립박물관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여러 차례 한국미술특별전을 유치, 개최하여 한국문화의 소개에 기여한 바 크다.
이 밖에 브레멘의 해외박물관, 프랑크푸르트의 미술수공품박물관, 슈투트가르트의 민족학박물관, 함부르크의 민족학박물관 등 큰 도시의 박물관에는 예외없이 한국유물이 수집되어 있다.
이 중 뮌헨의 민족학박물관은 기산풍속도를 비롯하여 여러 서화류와 민속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특히 에카르트 신부의 수집품이 주목을 끈다. 1995년에는 쾰른동양박물관에 한국실을 개관하여 우리의 유물을 전시해오고 있다.
독일의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에는 이처럼 미술품에 치중하기보다는 19세기 말 이래의 한국의 민속 및 공예품 · 사진 · 지도 등이 수집, 소장되어 있어 한국의 생활문화의 이해가 더 강조된 면을 볼 수 있다.
1990년 통독 이후 독일은 자국의 정치와 경제안정에 치중, 1999년 말 현재도 안정적이지는 않지만 강대국의 면모를 갖추면서 대외관계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통독 이후의 우리 문화도 더욱 독일인의 생활과 밀접하게 전개될 것이다.
(3) 한국연구 및 출판
일제강점기에 이의경과 에카르트에 의하여 뿌리내려진 독일의 한국학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서독과 동독에서 각기 다른 길로 전개되었다.
서독에서는 1950년대 먼저 베를린대학교 · 뮌헨대학교 · 함부르크대학교 · 본대학교에 한국어강좌가 개설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중국학과의 부속강좌로 존속하였고, 한국학 전공이 아닌 한국유학생에 의하여 담당되어 한국학으로 성장하는 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에카르트 · 카로(Karow,O.) · 레빈(Lewin,B.) 등은 서독에서 한국학의 초석을 다진 학자들이다. 에카르트는 1957∼1974년 동안 뮌헨대학교에서 한국학강좌를 담당하기 전부터 왕성한 저술활동을 계속하여 1955년 ≪한국의 인삼 Die Ginsengwurzel≫을, 그리고 이 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1960년 ≪한국의 역사와 문화 Korea;Geschichte und Kultur≫라는 저서를 내었다.
한국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 업적을 치하하여 75세 되던 1959년에 기념논문집 ≪코레아니카 Koreanica≫가 증정되었다. 1956년에는 그를 기념하는 ‘에카르트 메달’이 한독협회에 의하여 제정되어 한독문화교류에 공헌이 많은 사람에게 수여되고 있다.
카로는 프랑크푸르트대학교에서 중국학과 한국학을 가르쳤으며, 본대학교에서는 차헤르트(Zachert)가 한국학강좌를 맡아오다가 중단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한국학은 점차 독일 정부와 일반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4년 동아시아학의 정책대학으로 개편된 보쿰대학교에는 일본학 교수인 레빈의 지도 아래 아이케마이어(Eikemeier,D.)와 자세(Sasse,W.)가 서독에서는 맨 처음으로 한국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아이케마이어는 ≪연암 박지원 사상에서의 정치적 요소 Die Politischen Elemente im Denken Yonam Pak Chiwon≫를 비롯, ≪장좌리문서 The Documents from Changjwari≫라는 저서를 내었고, 1980년 서독에서 처음으로 독립된 한국학과를 개설한 튀빙겐대학교의 교수로 취임하여 제자 양성에 노력하고 있다.
보쿰대학교의 한국학 전공자들은 그밖에 한국의 언어 · 문화 · 역사 등에 걸쳐 많은 논문을 발표하는 한편, 한국의 학자들과도 긴밀한 학문적 유대를 이루어 학술교류가 왕성하다.
이기문(李基文)의 ≪개정국어사개설 改訂國語史槪說≫이 보쿰의 한국학 학도들에 의하여 번역되어 1977년 ≪한국어사 Geschichte der Koreanischen Sprache≫로 출판된 것은 그러한 열의의 한 결실이다. 한편 독한협회, 독일어권한국학협회 등에서 수행하는 각종 한국연구프로그램을 우리 나라에서 지원하고 있다(1992∼1999).
서독 한국학의 또 다른 중심지로 함부르크를 들 수 있다. 다른 도시에 비하여 함부르크의 한국학은 다양하다. 이 학교에는 이미 중국학과에 한국어강좌가 개설되어 있고, 독일 외무성 관계의 아시아학연구소에는 조명훈(趙明勳)이 북한전문연구원으로서 ≪계간북한 North Korea Quarterly≫의 편집을 담당해 오고 있다.
민족학박물관의 동양학부장인 프루너(Prunner,G.)는 1975∼1976년 한국에서 신흥종교에 관한 현지조사와 자료수집을 수행하였고, 그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1977년 ‘한국신흥종교자료센터’를 동양학부 부설기관으로 개관하였다.
그는 한국신흥종교와 무(巫)에 관한 일련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연구원으로 있던 조흥윤(趙興胤)은 ≪한국의 무 Koreanischer Schamanismus≫를 박물관총서로 출판하였다.
1984년 한독수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특별전시회가 이곳에서 개최된 것도 특기할 사항이다. 이 밖에도 서독에는 한국학에 관한 숱한 개별연구와 논저 및 학문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 몇몇 예를 들면 후베(Huwe,A.)는 1979년 ≪한국의 동화 Märchen aus aller Welt, Korea≫를, 멘데(Mende,E.von.)는 1982년에 ≪12세기까지의 한반도 안의 국가들과 중국 China und die Staaten auf der Koreanischen Halbinsel bis zum 12.Jh.≫을 출판하였다.
본대학교에서는 구기성(丘冀星)이 한국학을 강의하고 세종문고를 설치하였으며, ≪한(韓) Koreanische Studien≫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있다. 서독 한국학연구의 이러한 열기에 부응하여 1979년에는 보쿰에서 유럽한국학자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동독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동독과 서독으로 분리된 이후 초기에는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대학을 중심으로 점차 정비되어 갔다.
1950년대에는 원래 이란학자인 융커(Junker,H.F.)가 1958년 묄렌도르프 미망인 소장의 기산풍속도를 자료로 하여 ≪기산, 옛 한국그림들 Alte Koreanische Bilder≫을 출판하였고, 또한 베를린대학교에서 한국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1950년대 중반 북한에서 온 동포가 라이프치히대학교와 베를린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강의하는 정도였다.
1960년대에 들어오면 국가정책의 일환으로 아시아 · 아프리카 등의 이른바 피지배국가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져 1968년의 대학개편 때 그것이 큰 대학에 배분되었다. 그에 따라 베를린대학교(현재 훔볼트대학교)가 아시아연구를 떠맡아 아시아학부를 두었다.
이 학부에는 몽고학과 · 일본학과 · 중국학과 · 티베트학과와 함께 한국학과가 개설되고, 한국학은 서유럽대학의 경우와는 달리 처음부터 중국학 · 일본학과 같은 대접을 받으며 출발하였다.
한국학과의 교육연한은 5년으로, 먼저 1년간은 한국어를 집중적으로 배우고 2·3학년차에는 한국의 역사와 문법을 배우며, 4·5년차에는 북한에 가서 현지에서 2년간 한국학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귀국하면 학사를 취득한다. 이 학과에는 1980년대 괴텔(Gӧthel,I.) · 렌트너(Rentner) · 피히테(Pichte) 등 세 여자교수와 강사인 헤르만(Herrmann)이 있었다.
이들 중 괴텔을 제외한 세 사람은 융커의 제자로서 렌트너는 한국문학을, 피히테는 정치, 그리고 헤르만은 언어와 문법을 가르쳤고, 괴텔은 이 학과의 과장직을 맡으면서 한국역사를 주로 교육하였다. 괴텔은 1978년에 ≪한국사 Geschichte Koreas≫를, 1988년에는 ≪남한의 역사 Geschichte Süd-Koreas≫를 출판하였다.
한편, 1992년부터 1999년 말 현재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주관하에 한국학강좌를 운영지원하고 있다. 대표적인 대학으로 튀빙겐대, 트리어대, 파사우대, 프랑크푸르트 괴테대, 훔볼트대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괴테대, 훔볼트대 등에 한국학 관련객원교수제를 도입, 우리 나라에서 이들도 지원하고 있다. 한국학 관련 자료가 소장되어 있는 뮌헨대에는 관련자료를 체계화 하는데 드는 경비를 지원하고 있다(1992∼1999). 이어 1999년에는 한국학 전공생을 대상으로 한 장학제도를 신설, 운영하고 있다.
대학에서의 한국학 연구 외에, 1986년부터는 북한으로부터 수백 명의 유학생들이 동독으로 몰려왔고, 1990년 동서독의 통일로 생활 속에서 한국문화를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