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 ()

법제·행정
개념
법에 관한 체계적인 인식을 목적으로 법에 관한 체계적인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
정의
법에 관한 체계적인 인식을 목적으로 법에 관한 체계적인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
개설

실정법의 체계적인 해석을 목적으로 하는 법해석학, 법의 근본문제를 탐구하는 법철학, 법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연구하는 법사학, 법과 사회의 상호 관련성을 탐구하는 법사회학, 여러 법질서들을 상호 비교연구하는 비교법학, 사회정책·형사정책 등에 따른 법의 정립을 탐구하는 법정책학 등을 포함하는 학문 영역이다.

법해석학에는 해석의 대상이 되는 실정법의 분야에 따라 헌법학·민법학·상법학·행정법학·형법학·국제법학·사회법학·소송법학·국제사법학 등이 있다.

법학은 실정법의 체계적인 해석을 중심 과제로 삼는 학문이므로, 실정법과 무관하게 발전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20세기에 전통적인 법체계를 버리고 서구의 근대적인 법체계를 수용하게 되어, 우리의 법은 역사적 연속성을 단절하게 되었다. 이로써 법학도 전통적 율학(律學)과 근대적 법학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전통적 율학

통일신라시대에 국학에 율령박사(律令博士)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시대의 율학은 국자감(國子監)에서 교수하던 육학(六學)의 하나였다.

여기에는 18세 이상 25세 이하의 학생이 입학했으며, 교수는 율학박사와 율학조교(律學助敎)가 담당하였다. 987년(성종 6)에는 명법업(明法業) 2인에게, 993년에는 명법과(明法科) 3인에게 급제를 내려 7품직을 수여하였다.

시험은 율·영 각 10조를 암기하고, 문장을 독파하게 하는 비교적 낮은 수준이었다. 이런 점에서 고려의 율학은 율령을 암기하고 해석하는 데 그친 단순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조선의 율학은 잡학(雜學)의 하나로 형조 안의 율학청(律學廳)에서 가르쳤다.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따르면, 율학은 형조에 40인, 6부(府)에 각 16인, 5대도호부(大都護府)에 각 14인, 20목(牧)에 각 14인, 154현(縣)에 각 8인 등 모두 3,346인을 뽑았다.

한편, 율과의 정원은 초시(初試) 18인, 복시(覆試) 9인에 불과하였고, 행정과 사법이 분리되지 않은 체제에서 행정관의 보조기능을 했을 뿐이었다. 율학박사는 2인으로 종8품, 율학조교는 2인으로 종9품이었다.

이와 같이 율학은 경학(經學)에 비해 열등했으며, 서구와는 달리 법률가가 독립된 사회계층을 이루지 못하였다.

율학서는 ≪당률소의 唐律疏議≫·≪율학해이 律學解頤≫·≪율해변의 律解辯疑≫ 등 중국 서적이었다.

조선에서는 중국의 ≪대명률 大明律≫을 의용(依用)하였고, 이를 우리의 실정에 맞게 해설한 ≪대명률직해 大明律直解≫를 편찬하였다.

또 행정관과 율사들이 실제로 송사(訟事)를 담당할 때 증거 채택과 법의학(法醫學)에 관한 지식이 필요했으므로, 중국의 ≪무원록 無寃錄≫을 우리말로 풀이한 최초의 한글 법학서라고 할 수 있는 ≪무원록언해 無寃錄諺解≫를 펴냈다.

정도전(鄭道傳)의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을 비롯한 각종 법전, ≪심리록 審理錄≫·≪추관지 秋官志≫ 등이 있었으나, 이들은 법학연구서라기보다 법전 내지 사건기록집에 지나지 않았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조선시대까지는 법전과 재판은 있었으나, 법학은 크게 형성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에 정약용(丁若鏞)은 ≪흠흠신서 欽欽新書≫에서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고 법학의 독립성을 주장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형조좌랑(刑曹佐郞) 강항(姜沆)과 유학자 이진영(李眞榮) 및 그의 아들 이매계(李梅溪)가 일본 학자들에게 ≪대명률직해≫와 ≪경국대전 經國大典≫ 등을 가르치면서 일본 법학사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서구의 근대적 법학이 우리 나라에 최초로 소개된 것은 18세기 말에 유입된 한역(漢譯) 서학서(西學書)를 통해서였다. 실학자들의 문집에 나타난 한역 서학서 가운데 알레니(Aleni,J.)의 ≪서학범 西學凡≫과 ≪직방외기 職方外紀≫에 서양 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소개하여 처음으로 ‘법학’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법학을 소개하는 데 특히 주목한 학자는 없었고, 서양 종교와 학문 일반을 비판하는 학자들이 호기심으로 읽는 정도에 그쳤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대에 서양 법학을 수용한 것은 초기 수용 내지 반수용(反受容)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한편, 1881년(고종 18) 일본에 파견된 신사유람단 가운데 일본 사법성을 시찰하고, 서양법으로 개화된 일본의 법제를 보고 돌아온 엄세영(嚴世永) 일행은 ≪일본사법성시찰기≫와 ≪일본견문사건초 日本見聞事件草≫를 저술하였다.

또한 개항과 더불어 유길준(兪吉濬)·서재필(徐載弼) 등이 미국에서 서구의 문명제도를 배우고 돌아와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유길준은 ≪서유견문 西遊見聞≫에서 서양의 국가·법·권리·자유 등을 소개하였고, 서재필은 ≪독립신문 獨立新聞≫의 논설을 통하여 개화된 법의식을 고취하였다.

1895년 일본으로 파견된 관비유학생 가운데 이면우(李冕宇)·유문환(劉文煥)·장도(張燾)·홍재기(洪在祺)·석진형(石鎭衡)·박만서(朴晩緖)·신우선(申佑善)·장헌식(張憲植)·유치형(兪致衡)·양대경(梁大卿) 등이 귀국하여 법관양성소와 보성법률전문학교의 교관이 되어 법학을 연구할 수 있는 최초의 진용을 이루었다.

또 함태영(咸台永)·이준(李儁) 등 법관양성소 졸업생과 주정균(朱定均)·이용무(李用戊)·김상연(金祥演) 등 보성전문학교 출신들도 법학 교과서와 논문들을 발표하여 국내파 법학자의 진용을 형성하였다.

한편, 법학의 근대화를 불러일으킨 자극제는 중국에서 한역된 서양 국제법서가 전래된 것이었다. 휘턴(Wheaton,H.)의 ≪만국공법 萬國公法,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1864), 울시(Woolsey,T.)의 ≪공법편람 公法便覽,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International Law≫(1877), 블룬칠리(Bluntschli,J.K.)의 ≪공법회통 公法會通, Das moderne Volkerrecht der civilisierten Staaten als Rechtsbuch dargestellt≫(1880) 등이다.

특히 ≪공법회통≫은 1896년 학부(學部)에서 청국판에 편집국장 이경식(李庚植)의 서문을 덧붙여 출판, 고종과 대신들에게 배포하여 1899년 대한제국 국제(國制)를 제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서양의 국제법서가 한 나라의 헌법에 이처럼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국제법에 의지하여 우리 나라가 독립주권국가임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자 한 의지의 표현이며, 한국 법학의 커다란 성과라고 하겠다.

또한 1882년의 묄렌도르프(Mollendorff,P.G.)를 선두로 서양 법률가 출신의 고문관들이 우리 정부에서 활동하였다.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개혁 Die Reorganisation Koreas≫에서 “한국은 명나라에서 유래하는 야만적 고법(古法)을 개화된 새 법으로 고쳐야 하고, 새 법은 한문으로 쓰지 말고 한글로 엮어야 한다.”고 기록하였다.

후임인 미국판사 출신 데니(Denny,O.N.)는 ≪청한론 淸韓論, China and Korea≫을 저술하여 한국이 국제법적으로 독립국임을 주장하였고, 르 장드르(Le Gendre,C.W.)·샌즈(Sands,W.)·그레이트하우스(Greathouse,C.)·크레마지(Cremazy,L.)·스티븐스(Stevens,D.W.) 등이 뒤따랐다.

특히 크레마지는 한국 학생들에게 프랑스 법학을 개인교수하여 5명의 법관양성소 교관을 배출하였고, ≪형법대전≫의 입법작업에도 참여하면서 그것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Le Code Penal de la Coree≫라고 출판하여 세계에 알렸다. 이에 대하여 일본 정부의 법률고문으로 있던 부아소나드(Boissonade,G.E.)가 논평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국의 법과 법학은 세계 법학과 서서히 연결되어갔다.

아직 헌법·형법·민법·상법·소송법 등 실정법률이 제정되지 않은 때였지만, 서양과 일본을 통하여 소개된 법학에 대한 요청과 관심의 급증으로 각종 법학서적이 출판되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나라에는 근대적 법보다 법학의 수용이 먼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때는 이미 을사조약 이후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문화와 교육을 통해 중흥시키려는 이른바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법학을 수립하는 것이 민족의 자강과 애국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법학서들과 논문들을 많이 발표하였다.

법학 교과서로 나온 것은 ≪법학통론≫(유성준), ≪법학통론≫(주정균), ≪헌법≫(유치형), ≪헌법≫(조성구), ≪헌법≫·≪국가학≫(김상연), ≪행정법대의≫(장헌식), ≪지방행정론≫(조성구), ≪민법총론≫(신우선), ≪물권법 1·2부≫(유치형), ≪물권법 2부≫(박만서), ≪물권법≫(유동작), ≪채권법 1부≫(석진형), ≪채권법 2부≫(조성구), ≪민사소송법≫(홍재기), ≪상속법≫(박만서), ≪상법총론≫(주정균), ≪상법요의≫(김상연), ≪회사법≫(이면우), ≪회사법≫(김상연), ≪상행위법≫(안국선), ≪해상법≫(유치형), ≪어음법론≫(신우선), ≪형법총론≫(장도), ≪형법각론≫(이면우), ≪국제공법≫(이용무), ≪만국공법≫(주정균), ≪평시국제공법≫(석진형), ≪국제사법≫(유문환) 등이었다.

이들 법학 교과서들은 발행처, 발행 연월일이 명기되지 않았지만 대개 1907, 1908년을 전후하여 보성관(普成館)에서 나왔다. 이들은 거의 법학 강의에 필요하여 저술된 기록이기 때문에, 당시의 일본 법학 교과서를 참고하여 번역에 가까운 저술을 한 것이었다.

법학은 처음부터 독창적인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번역법학(飜譯法學)이 되는 것은 동서양 공통적인 일이다. 예컨대, 유치형의 ≪헌법≫은 당시 동경대학의 헌법학자 호즈미야스카(穗積八束)의 ≪헌법강의≫를 준거, 채택한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데, 일본식 천황주의 헌법학을 고종 치하의 우리 현실에 접목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교과서들이 전부 번역에 불과하지는 않았고, 군데군데 우리의 법현실을 지적하고 비교법학적 안목으로 하루 속히 한국법의 근대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애국적 계몽법학, 민주법학으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개화기에 나온 각종 학회지에도 거의 빠짐없이 법학 논문들이 실려 있었다.

이들 최초의 법학자들은 1908년 법학협회를 조직하였는데, 회원은 111명이었으며, 많은 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법학의 대중화를 위하여 법률계몽강연회를 주최하고, 법률 무료상담을 하는 한편, ≪법학협회잡지≫를 매월 발간하여 19호까지 냈다.

그러나 1910년 국권 상실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1915년에 재건되어 회지를 ≪법학계 法學界≫로 바꾸어 6호까지 냈으나 또 중단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의 법학

일제는 법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이 법을 잘 알지 못하도록 우민정치를 계획하였다. 그래서 한말에 싹튼 한국 법학을 일본 법학으로 거의 대체하였다.

법관양성소는 법학교로 바뀌었다가 경성법학전수학교로 존속했는데, 여기에서는 대부분의 일본인 교수와 김병로(金炳魯)·양대경 등 한국인 교수가 가르쳤다.

보성전문학교는 그 전대로 명맥을 유지하였고, ≪법정학계 法政學界≫·≪보전학회논총 普專學會論叢≫ 등을 발간하였다. 여기에는 최태영(崔泰永)의 <토라(Torah)에 관한 연구>가 3회나 연재되었고, 유진오(兪鎭午)의 <중세에 있어서 정의사상>이 실렸다.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고, 법문학부가 생김에 따라 한국 법학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일본을 통한 서양 법학을 가르쳤고, 그것이 한국 법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교수는 모두 일본 법학자들이었고, ≪경성제대 법문학부 논문집≫에도 그들의 연구 업적만이 실렸으며, 그 중에는 한국 법사(法史)에 관한 논문들도 있었다.

한국인으로는 유진오·최용달(崔容達)·서재원(徐載元)·주유순(朱愈淳) 등의 조수(助手)가 있었을 뿐이다. 한마디로 민족항일기의 한국 법학은 동결기였다고 할 수 있다.

광복 이후의 법학

광복 직후 한국 법학계는 연구 인구가 빈곤한 상태에서 출발하였다.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는 유진오를 중심으로 한 경성대학 법학부가 되었고, 경성법학전문학교는 고병국(高秉國)을 교장으로 재출발하였다. 1946년에는 이를 합하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 되었다.

보성전문학교는 1946년 9월에 고려대학교로 승격하였고, 1947년에서 1950년 사이에 국민대학·성균관대학·단국대학·국제대학·신흥대학(경희대학교의 전신)·연세대학·이화여자대학 등에 법학과가 신설되었다.

또 6·25전쟁 이후 1959년까지 동국대학·숭실대학·건국대학·한양대학에도 법학과가 설치되었고, 1960년대에는 경기대학·한국외국어대학·명지대학 등에도 법학과가 생겨남으로써, 거의 모든 대학에 법학과가 설치되었다.

1949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법학과 교과과정을 보면 헌법, 민법 1∼4부, 형법 1·2부, 상법 1∼3부(4부는 선택), 민사소송법 1·2부, 형사소송법, 행정법 1부, 국제공법 1부, 로마법 또는 서양법제사, 영미법 또는 대륙법, 법철학, 사회법 1·2부, 조선법제사 등이 필수과목이었고, 헌정사·경제사·국가학·정치사·경제정책·재정학·정치학사·외교사·조선경제사 등이 선택과목이었다. 이 교과과정은 그 뒤 몇 과목이 추가되었지만 오늘날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외관상으로 보면, 법학은 상당한 양적·질적 발전을 하였으나, 아직 미흡함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특히 광복 후 법학의 풍토가 사법시험을 중심으로 한 수험법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데 따른 것이며, 법학잡지도 수험잡지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학문으로서의 법학 발전에 뜻을 둔 법학자들이 노력을 계속 해 오고 있다.

광복 후 미군정과 미국 문화의 영향으로 많은 법률가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하여 영미법학(英美法學)을 공부하였으며, 이들은 대륙법 일변도의 한국 법학에 비교법학적 지평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한국 법학의 대종은 역시 대륙법학, 특히 독일 법학이며, 독일 유학을 다녀온 많은 법학자들이 대학강단에서 법학 건설의 주역을 이루고 있다.

현대 법학의 발전

현대 법학의 학문 분야는 광범위하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범주로 나누어 그 연구사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헌법학

광복 후 나온 최초의 헌법서는 이창수(李昌洙)의 ≪대한민국헌법대의≫(1948)였으며, 학술서로는 1949년 1월 유진오가 저술한 ≪헌법대의≫였다. 1957년 7월에는 한국공법학회(회장 유진오)가 창립되어 ≪공법연구≫를 간행하였다. 제2공화국 때 많은 헌법 교과서들이 나왔는데, 주로 독일에 유학한 학자들의 연구논문이었다.

1969년에는 한국헌법학회(회장 韓泰淵)가 발족되어 ≪헌법연구≫를 발행하였다. 제5공화국이 출발하면서 헌법학자들은 활기차게 헌법 개정 논의에 참여하였고, 김철수(金哲洙)·권영성(權寧星)·구병삭(丘秉朔)·허영(許營) 등의 헌법이론서가 판을 거듭하며 나오고 있다. 헌법학은 정치 변동과 직결되면서, 그때마다 많은 연구와 교과서가 나오고 있다.

행정법학

광복 후 새로운 정부조직 등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것은 윤세창(尹世昌)·한태연·이종극(李鍾極)·황동준(黃東晙) 등이 저술한 행정법 교과서였다. 1950년대 말까지 행정법학의 목표는 실정법규를 정리하고 영미 행정법 및 독·불 행정법 이론을 도입하여 이론체계를 정립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에 상당수의 행정법학자들이 관계(官界)로 진출하는 가운데 1970년대에는 행정법 이론체계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부터 윤세창·김도창(金道昶)·강문용(康文用)·이상규(李尙圭)·김남진(金南辰)·김이열(金伊烈)·박윤흔(朴鈗炘)·서원우(徐元宇)·김철용(金鐵容) 등의 연구업적이 많이 나왔다.

민법학

광복 후 민법학계는 민법 제정작업에 다수의 학자들이 참여함으로써 활기를 띠었다.

1957년 6월 민사법연구회(회장 李熙鳳)가 창립되어 <민법안의견서>를 제출하였다. 1958년 2월에는 민법전이 제정·공포되고, 1960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자, 거의 모든 교수와 실무자가 강의서를 출간하였다.

김용진(金容晉)·방순원(方順元)·김증한(金曾漢)·안이준(安二濬)·이희봉·김기선(金基善)·장경학(張庚鶴)·정범석(鄭範錫)·김현태(金顯泰)·최식(崔栻) 등이 저술한 책이 많이 읽혔다. 그러나 아직도 상당한 양이 일본 민법학의 체계와 이론에 의존하고 있었다.

1960년대에 들면서 독일·프랑스의 민법이론이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이론적 기초를 다지는 정돈기에 접어들었다. 현승종(玄勝鍾)·곽윤직(郭潤直)·김용한(金容漢)·이태재(李太載)·김주수(金疇洙)·이근식(李根植)·한봉희(韓鳳熙) 등이 저술한 연구서가 나왔다.

정광현(鄭光鉉)이 쓴 ≪한국가족법연구≫(1967)는 민법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의 영향 아래 이미 1963년에 한국가족법학회가 창립되었다. 이를 중심으로 이태영(李兌榮)·김주수·한봉희·박병호(朴秉濠)·이근식·최달곤(崔達坤)·배경숙(裵慶淑) 등의 연구업적이 나왔고, 가족법개정운동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1956년에 발족된 민사법연구회는 1974년부터 한국민사법학회(회장 김증한)로 이름을 바꾸고, ≪민사법학≫을 발간하고 있다. 그 밖에 민사실무연구회(회장 방순원), 민사판례연구회(회장 곽윤직) 등이 활동하고 있다.

상법학

광복이 되고도 예전의 상법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1963년이 되어서야 상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상법학은 그 전부터 상당히 활발한 연구활동을 보였다.

1957년 9월 한국상사법연구회(회장 최태영)가 결성되었다. 주유순의 ≪상법총칙강의≫(1950), ≪회사법강의≫(1950)가 최초로 나왔고, 이어서 최태영·차낙훈(車洛勳)·박원선(朴元善)·정희철(鄭熙喆)·서돈각(徐燉珏)·손주찬(孫珠瓚)·서정갑(徐廷甲) 등이 저술한 책이 나왔다.

상법학계는 계속 학문적·현실적 문제들에 대한 연구를 기울여 1970년대 이후로 최기원(崔基元)·양승규(梁承圭)·이범찬(李範燦)·박길준(朴吉俊) 등의 연구 성과가 선을 보였다.

형법학

광복 직후의 형법학자로는 유기천(劉基天)·심현상(沈鉉尙)·이건호(李建鎬)·엄상섭(嚴祥燮)·남흥우(南興祐)·김기두(金箕斗) 등이 있다. 1953년 4월 형법전의 제정과, 다음해의 형사소송법 제정을 계기로 형법학계는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형법전 제정 이전에 나온 교과서로는 심현상의 ≪형법총론≫(1949)이 있었고, 대체로 1955년 이후부터 형법학서들이 출간되었다.

1957년 6월에는 한국형사법학회(회장 이태희)가 창립되었다. 1960년대에 들면서 많은 형법학서가 나왔는데, 유기천·백남억(白南檍)·황산덕(黃山德)·정창운(鄭暢雲)·남흥우·서일교(徐壹敎)·김용진(金容晉)·김종수(金鍾洙)·정영석(鄭榮錫)·염정철(廉政哲)·박정근(朴正根) 등의 저서를 들 수 있다.

1960년대에는 연구 인구가 별로 증가하지 않았지만, 김종원(金鍾源)·정종욱(鄭鍾勗) 등의 활동이 있었다. 특히 정종욱은 독일 ‘막스플랑크 외국 및 국제형법연구소’에 근무하면서 한국의 형법을 독일에 소개하는 데 기여하였다. 1970년대에는 심재우(沈在宇)·이수성(李壽成)·강구진(姜求眞)·이형국(李炯國)·이재상(李在祥)·김일수(金日秀) 등의 학자들이 연구업적을 냈다.

최근에는 형법이론 못지않게 형사학 및 형사정책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으며, 실무 법조인들이 해외 연수 후에 연구업적을 내고 있다.

소송법학

광복 이후 서일교의 ≪신형사소송법≫을 비롯하여 최대교(崔大敎)·김용식·강서룡(姜瑞龍) 등이 저술한 교과서가 나왔다. 김기두의 ≪신형사소송법≫을 많이 보았으며, 염정철·정영석·이용훈·권오병(權五柄)의 형사소송법 연구서들도 나왔다.

<민사소송법>에서는 1952년 백한성(白漢成)의 ≪민사소송법석의 民事訴訟法釋義≫가 나왔고, 최초의 교과서로 이영섭(李英燮)의 ≪민사소송법강의≫(1953)가 나왔다. 이어 방순원의 ≪신민사소송법≫을 비롯하여, 이석선(李石善)·유택형(柳宅馨)·김홍규(金洪奎)·송상현(宋相現)이 저술한 연구서들이 나왔다.

사회법학

광복 이후 노동법은 비교적 미국식 노동법학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출발하였다. 1956년 박덕배(朴德培)의 ≪사회법서설과 노동법≫, 심태식(沈泰植)의 ≪노동법≫이 나왔다. 그리고 1957년 6월에는 한국노동법학회(회장 金致善)가 창립되었다. 1960년 김치선의 ≪경제법·사회보장법≫이, 이어 1965년에는 ≪신노동법≫이 나왔다.

1962년에는 김진웅(金進雄)의 ≪노동법≫과 최식의 ≪신노동법≫이 나왔다. 김여수(金麗洙)는 ≪노동법≫(1970)과 ≪한국노동법≫(1975)을 펴냈으며, 김형배(金亨培)는 ≪노동법≫(1974), 김유성(金裕盛)은 ≪사회보장법론≫(1992)·≪노동법Ⅱ≫(1996)를 출간하였다. 그리고 1977년에는 한국경제법학회(회장 文仁龜)가 창립되어 ≪경제법연구≫를 발간하고 있다.

문화법학

문화법학은 아직 연구 인구가 적은 상태인데, <교육법>·<저작권법>·<영화연극법>·<언론법>·<도서관법>·<문화재보호법>·<종교법> 등에 관한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1981년 12월 한국종교법학회(회장 이태재)가 창립되어 ≪법과 종교≫를 발간하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 지적소유권법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국제법학

광복, 6·25전쟁, 휴전, 한일회담, 남북협상 등 계속 발생하는 국제법적 문제들로 상당히 활기를 띠고 있다. 1953년 6월 대한국제법학회가 창립되어, ≪대한국제법학회논총≫을 계속 발간하고 있다.

국제법학자로는 유진오·박관숙(朴觀淑)·이한기(李漢基)·이건호·박재섭(朴在灄) 등이 연구업적을 냈고, 이어서 배재식(裵載湜)·최재훈(崔在勳)·백도광(白道光)·이병조(李丙朝)·박춘호(朴椿浩)·김명기(金明基)·지정일(池禎一)·유병화(柳柄華) 등의 저서들이 나왔다.

법철학

광복 이후 유진오·이항녕(李恒寧)·황산덕에 의해 출발하였는데, 켈젠(Kelsen,H.)의 순수법학, 법과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와의 관계에 관한 관심이 컸다.

1957년 9월 한국법철학회(회장 황산덕)가 창립되었다. 1950년 황산덕의 ≪법철학≫이, 1955년에는 이항녕의 ≪법철학개론≫이 나왔다. 이어 박덕배의 ≪법철학개론≫(1964), 심헌섭(沈憲燮)의 ≪법철학Ⅰ≫(1982)이 나왔다.

영미 법철학의 번역서로 파운드(Pound,R.) · 홈즈(Holmes,O.W.) · 홀(Hall,J.) 등의 저서를 장경학·서돈각 등이 번역한 것들이 있으며, 함병춘(咸秉春)·양승두(梁承斗) 등은 영미 법철학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로는 차차 독일 법철학이 우세하게 소개되었는데, 김지수(金智洙)·정종욱·권영백(權寧百) 등이 독일에서 라드브루흐(Radbruch,G.)의 연구로 학위를 받았으며, 서돈각·최종고(崔鍾庫)·심재우·정종욱·박은정(朴恩正) 등이 라드브루흐·볼프(Wolf,E.)·카우프만(Kauffmann,A.)·마이호퍼(Maihofer,W.)·벨첼(Welzel,H.) 등을 번역, 소개하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학자들은 한국의 법사상을 모색하는 데 관심이 점차 커지고 있으며, 1983년에는 한국법철학 및 사회철학회(회장 서돈각)가 새로 발족하였다.

법사학

법제도사와 법사상사로 나눌 수 있으며, 서양·동양 및 한국법제사를 포함한다. 서양 법제사에는 김증한의 ≪서양법제사≫(1953), 현승종의 ≪서양법제사개설≫(1963), 황적인(黃迪仁)의 ≪로마법·서양법제사≫(1981), 최종고의 ≪서양법제사≫(1986) 등이 있고, 최종고·정종휴(鄭鍾休)가 코잉(Coing,H.)의 ≪독일법제사≫(1982)를 번역, 출간하였다. 동양 법제사에는 이렇다 할 교과서가 없다.

한국 법제사에는 전봉덕(田鳳德)의 ≪한국법제사연구≫(1968), 박병호의 ≪한국법제사고 韓國法制史攷≫(1974)·≪한국의 법≫(1974), 김용태(金容泰)·명형식(明炯植)·나용식(羅用植)이 공동 저술한 ≪한국법제사개요≫(1981), 연정열(延正悅)의 ≪한국법제사≫(1984) 등이 있다.

서양 법사상사에는 현승종의 ≪법사상사≫(1957), 한상범(韓相範)·이종린(李鍾麟)이 공동 집필한 ≪법사상사개설≫(1962), 김여수의 ≪법률사상가≫(1965), 최종고의 ≪법사와 법사상≫(1980)·≪한국의 서양법수용사≫(1982)·≪법사상사≫(1983) 등이 있으며, 동양 법사상사에는 아직 단행본 연구서가 없다.

한국 법사상사로는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한국사상대계 Ⅲ≫에 법사상사 부분을 몇 명의 학자들이 분담 집필한 것이 있으며, 전봉덕의 ≪한국근대법사상사≫(1982)가 있다.

1973년 한국법사학회(회장 전봉덕)가 창립되어 ≪법사학연구≫지를 발간하고 있다. 로마법에 관한 조규창(曺圭昌)·최병조(崔秉祚)의 연구서들이 나왔고, 윤철홍(尹喆洪)이 카저(Kaser,M)의 ≪로마법제사≫(1998)를 번역하였다.

법사회학

한국 법학은 규범과학·개념과학에 치중되어 사실과학으로서의 법사회학 연구는 부진한 상태이다. 그러나 에를리히(Ehrlich,E.)·베버(Weber,M.)·귀르비치(Gurvich,G.)·레빈더(Rehbinder,M.) 등의 법사회학서를 이항녕·장경학·김여수·고영복(高永復)·최식·최종고·이영희 등이 번역하였다. 최대권(崔大權)의 ≪법사회학≫(1983), 양건(梁建)의 ≪법사회학≫(1986)이 있으며, 함병춘·양승두 등의 연구논문이 있다. 아직 학회는 조직되지 않았다.

비교법학

광복 이후 대륙 법학 외에 영미 법학의 영향으로 비교법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957년 5월 한국비교법학회(회장 嚴敏永)가 창립되었고, 유수한 법학자들이 거의 참여하였다. 1960년대부터 대륙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김진(金辰)의 ≪불란서법요론≫(1961), 곽윤직의 ≪대륙법≫(1962)이 나왔다. 1976년 6월에는 한독법률학회(회장 김증한)가 결성되어 ≪한독법학≫을 발간하고 있으며, 독일 학자들을 초청하여 학술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비교법학의 개설서로는 현승종의 ≪비교법입문≫(1972)이 있다. 아직까지 한국 법학은 외국 법학의 이론을 수입하는 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근년에 들어서면서 한국 법과 법학을 일본어·중국어·영어·독일어·프랑스어로 집필하여 소개하는 논조들도 나오고 있다.

법학의 문제점

법학은 우수한 두뇌를 가진 자의 법과대학 입학과 현대사회에서의 법학에 대한 중요성 인식으로 1세기 만에 상당한 연구진과 연구업적을 갖추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점과 취약점을 부인할 수 없다.

첫째, 법학의 발전을 기하려면 법학계와 법조실무계의 이원화 간격을 좁혀야 할 것이다. 둘째, 각종 법학회의 활동들이 보다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법학관계 학술지가 수험지를 탈피하여 학술연구지로 발전해야 할 것이다.

넷째, 한국법학원이나 한국법학교수협의회와 같은 기존 기관들의 활동이 강화되어야겠다. 다섯째, 법학교육과 사법시험과의 관계에 대해 재검토하여 법학교육의 정상화와 풍요화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 법학이 실정법의 해석학에만 머물지 말고 기초 법학 분야가 육성되어야 할 것이다. 일곱째, 외국 학계와의 교류와 선진 법률문화와의 비교검토가 요청된다.

여덟째, 각종 매스컴과 현대적 매체를 통하여 법과 법학의 대중화와 현대화를 지향해야겠다. 아홉째, 한국의 분단 상황 아래에서 한국 법학이 부딪친 보편성과 특수성 간의 논리의 조화를 찾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법학 담당자인 법학자의 수적 증가와 함께 그들 자신의 확고한 학문적·세계관적 신념 정립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한국법학사』(최종고, 박영사, 1990)
『한국법입문』(최종고, 박영사, 1994)
『한국의 법학자』(최종고, 서울대 출판부, 1989)
『한국의 법률가상』(최종고, 길안사, 1995)
『한국법사상사』(최종고, 서울대 출판부, 1989)
『한국근대법사상사』(전봉덕, 박영사, 1980)
『근세의 법과 법사상』(박병호, 진원, 1996)
『한국법의 실상과 허상』(문인구, 상지원, 1985)
『국법제사연구』(전봉덕,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8)
『한국의 법』(박병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한국법제사』(박병호, 법문사, 1974)
『한국의 서양법수용사』(최종고, 박영사, 1982)
『법사와 법사상』(최종고, 박영사, 1982)
「한국의 법제와 법학」(유진오, 『유네스코 한국편람』, 1957)
『한국법의 이해』(서원우 편, 두성사, 1996)
『한국법학의 증언』(김회한, 교육과학사, 1989)
On the Reception of Western Law in Korea(Chongko Choi, Korea journal of Comparative Law Vol. 9, 1980)
Traditional and Western Law in Korea(Chongko Choi, Social Science journal Vol. 9, 1982)
「Die Rezeption des westlichen Rechts in Korea」(Chongko Choi, 『한독법학』 4, 1983)
「한국법의 근대화와 서양법의 수용」(최종고, 『제1회 한국법학자대회논문집』, 1998)
Introduction to Korean Law and Legal System(Sang Hyun, Song, ed, Kyung·Mun Sa, 1983)
Korean Jurisprudence politics and culture(Pyung Choon, Hahm, Yonsei Univ. Press,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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