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형식은 갖추지 않았으나 실질적 행위규범으로서 판례법이나 헌법적 습률과 더불어 전형적인 불문법이다. 법의 형식적 발달이 불문법에서 성문법으로 진화되었듯이 성문법이 발달되기 전에는 대부분 관습법의 형태로 규율되었으나 시대의 진전에 따라 점차 그 영역이 좁혀졌다.
그러나 성문법이 모든 사회현상을 빠짐없이 규정할 수는 없으므로 관습법의 고유영역이나 형태는 존속하고 있다. 관습법이 사실인 관습과 구별되는 것은 어느 정도 일반인 또는 일정한 직업이나 신분·계층에 속하는 사람을 구속하기에 이르면서 관습이 법적 확신에 따라 지지되어 법적 규범력을 지닌 데 있다.
전근대사회에서는 법과 여러 가지 사회규범의 개념이나 범주·효력·한계 등이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법과 사회규범 상호간의 관계도 선명하지 않았고 사회규범 내부에서의 분화도 분명하지 않았다.
근대국가로 접어들어 중앙집권적 권력구조의 형태를 띠게 되고 집권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국가가 제정한 법을 전면적으로 통용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제정법과 관습법의 대립이 두드러졌으며 19세기 초에 제정된 유럽의 많은 민법들, 예컨대 오스트리아의 ≪요셉법전≫(1786), 프로이센의 ≪일반란트법≫(1794), 프랑스의 ≪나폴레옹법전≫(1804)에서는 관습법의 효력이 부인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서 법의 민족적·역사적 성격을 주장하는 역사법학이 일어났고, ‘관습은 법의 최선의 해석자이다.’라는 구호 아래 관습법의 인정은 물론,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 주장하게 되었다.
19세기 말 독일민법의 제정에 있어서는 대논쟁 끝에 관습법의 효력을 법전에 명문으로 규정하지 않았고, 20세기 초의 스위스민법에서는 관습법의 보충적 효력을 인정하였다. 최근에는 관습법과 성문법을 동위(同位)로 보아 관습법의 개폐적 효력을 인정하려는 추세도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일찍이 고조선의 <팔조지금법>이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법전≫과 비견할 수 있는 원시법으로서 부여와 위만조선, 그리고 삼국시대 성문율이 제정되기까지 삼국의 관습률로서 오랜 전통을 계승하여 왔다.
한편, 고구려는 373년(소수림왕 3) 우리 민족 최초로 성문율을 제정하면서부터 중국 율령의 영향을 받았다. 그 뒤 계속해서 삼국은 물론 조선 왕조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풍습이나 생활양식이 다른 중국 율령의 적용에서 적지않게 거리감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율도 전문 502조의 당나라 법률을 고려 실정에 맞게 가려뽑아 전문 71조로 제정하였고, 고려 말기에는 그 당시 실정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 원나라의 율령인 <지정조격 至正條格>을 적용하였으나, 이 또한 거부현상을 일으켰다.
고려에 이은 조선의 형사법에 원용된 명나라 법률도 난해한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모든 백성들이 알기 쉽게 이두문으로, 우리 실정에 맞게 번역하여 사용하였다.
조선왕조의 육전(六典)인 ≪경국대전≫의 경우에서도 그 보완을 위해 ≪경국대전주해≫·≪대전속록≫·≪후속록≫을 제정했고, 이 ≪경국대전≫을 현실에 맞게 ≪속대전≫으로 개편하고 다시 ≪대전통편≫·≪대전회통≫을 각각 제정, 시행한 것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율령제도가 수립된 이후에도 관료조직과 형사관계에 관하여는 국가제정의 법체계가 마련되었으나, 민사관계나 그 밖의 대부분의 법 적용은 관습법에 의해 규율되었다.
일제는 강점 이전부터 지배의 자료로 삼기 위해 우리 나라의 관습법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여 부동산법조사회(1906)·법전조사국(1907) 등의 기구를 설치하고, ≪관습조사보고서≫(1910·1912) 등의 조사결과를 간행하였다.
그 뒤 <조선민사령 朝鮮民事令>(1912)에서 “조선인 상호간의 법률행위에 부(付)하여는 법령 중 공(公)의 질서에 관계되지 않는 규정과 다른 관습이 있는 경우에는 그 관습에 의한다.”, “제1조의 법률(조선민사령에 의해 한국에 적용될 민사관계 법률) 중 능력·친족 및 상속에 관한 규정은 조선인에 이를 적용하지 않는다.
조선인에 관한 전항의 사항에 부(付)하여는 관습에 의한다.”, “부동산에 관한 물권의 종류 및 효력에 부하여는 제1조에서 정한 물권을 제외하면 관습에 의한다.”라고 규정하여 우리 나라 재래의 관습을 법규범으로 통용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것들이 관습법으로 인정되는가는 조선총독부 당국의 유권적인 통첩이나 회답에 의해 규범력이 인정되었다. 따라서, 관습법에 대한 판단은 일제의 식민통치와 결부되어 이루어졌고, 그나마 인정된 관습법은 내선일체의 요구에 따라 점차 적용의 범위가 축소되었다.
<조선민사령>은 4차에 걸쳐 개정되었는데, 이에 따라 능력·친권·후견·친족회·씨(氏)·서양자(婿養子)·호내혼인(戶內婚姻)·재판상의 이혼 등에 관한 일본법 규정들이 적용되고, 이성양자(異姓養子) 등의 제도가 설치되었다. 부동산에 관한 물권에서도 1915년 이후에는 관습상의 물권을 인정한 예가 없다.
현행 우리 나라 <민법>은 관습법의 법원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제1조에서 “민사에 관하여 법률의 규정이 없으면 관습법에 의하고, 관습법이 없으면 조리(條理)에 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어 그 보충적 효력만 인정하고 있으나, 성문법에 대한 개폐적 효력까지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한편, <민법> 제106조에서 “법령 중의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관계없는 규정과 다른 관습이 있는 경우에 당사자의 의사가 명확하지 않은 때에는 그 관습에 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에서의 ‘다른 관습’과 관습법의 관계에 관해 여러 가지 해석이 나타난다.
즉, 관습을 관습법과 다른 ‘사실인 관습’으로 보고 관습법은 보충적 효력을 가지나 사실인 관습은 법률행위의 해석을 통해 임의법규를 개폐하는 효력을 가진다는 견해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인 관습과 관습법을 같은 것으로 보고 양자 사이에 효력상 차이가 없으나, 다만 법의 존재형식면에서 관습법이 성문법의 하위에 위치할 뿐 해석의 기준이라는 면에서는 임의법규에 우선한다는 해석론도 있다.
또 관습법 중 임의법규적 성질을 갖는 것만을 제106조의 사실인 관습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물권법에서는 제195조에서 “물권은 법률 또는 관습법에 의하는 외에는 임의로 창설하지 못한다.”라고 하여 관습법에 의한 물권을 성문법과 동등하게 인정하고 있으며, 실제로 수목의 집단 및 미분리(未分離)된 과실의 소유권 이전에 관한 명인방법(明認方法), 관습법상의 법정지상권(法定地上權), 분묘기지권(墳墓基地權), 동산의 양도담보 등 관습법상의 제도들이 있다.
<상법>에서도 제12조에서 관습법의 보충적 효력을 인정하고 있으나, <형법>에서는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에 따라 관습형법이 금지되어 있다. 행정법규 등 기타 공법에서도 <민법>에서와 마찬가지로 보충적 효력을 인정받는다.
한편, 관습법의 법적 확신에 의한 지지여부나 법적 규범력 및 인정·효력 등의 여러 가지 내용은 비단 우리 나라에서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며 국제법에 있어서도 관습법이 주요한 법원으로 인정된다.